[사람 사람] 돋보기 안 쓰는 92세 '젊은 오빠'

중앙일보

입력

이 봄, '건재(健在)'라는 단어가 한 사람에게만 돌아가야 한다면 그 영예의 주인공은 송방용 신임 헌정회장일 것이다. 헌정회는 전직 국회의원들의 모임이다. 회원은 1000여 명. 지난달 31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대의원 총회에서 92세의 송 옹은 60~70대의 건장한 젊은이(?) 3명을 물리치고 57%의 표를 얻어 임기 2년의 회장이 됐다.

"나는 보청기도, 돋보기도, 틀니도, 지팡이도 안 씁니다. 회장이 되든 안되든 나와 함께 백두산과 독도에 갑시다." 송 옹의 힘있는 유세는 대의원들을 사로잡았다.

송 회장은 1913년 전북 김제에서 태어나 배재고.연희전문(영문과)을 나왔다. 2.3대 민의원과 5대 참의원을 거쳐 10대 유정회 의원을 역임했다. 두번 낙선하기도 했다. 70년대에 경제과학심의위 상임위원과 장기(長期)자원대책위원장을 지냈고 80년대 이후로는 아무런 공직을 맡지 않았으니 그는 분명 박정희 시대 사람이다. 그런 노병이 한 세대를 훌쩍 뛰어넘어 무대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송 회장은 스스로 노익장의 비결로 세 가지를 꼽는다. 부모가 잘 낳아주었고, 평생 담배를 피워본 적이 없으며, 매일 운동을 빠뜨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오후 9시 뉴스 전에 잠자리에 든다. 오전 6시에 일어나면 아킬레스건으로 대나무통을 1000번 두드리고 한 시간 동안 요가를 한다. 하루에 7000보를 걷는다.

어쩌면 더 중요한 비결은 화목인 것 같다. 4년 전 세살 아래 아내가 85세로 세상을 떴다. 그는 아내의 유골을 단지에 담아 사진과 함께 침대 머리맡에 두고 있다. 매일 "갔다올게""나 갔다왔소"라고 인사한다. 미국에 있는 자식들이 보내주는 돈으로 생활에 부족함이 없고 손자 내외와 같이 산다.

그는 죽으면 자식들이 자신을 화장해 아내 유골과 함께 강물에 뿌려도 좋다고 한다. "70년대 장기자원대책위원장 시절 묘지제도를 고쳐보려 선진국을 돌아다닌 적이 있습니다. 묘지는 죽은 이가 산 사람들의 공간을 침범하는 것입니다."

송 회장은 2002년 대선 때 헌정회를 찾은 후보들에게 원로회의 의장 자격으로 따끔한 충고를 건네기도 했다. 그는 "후배 정치인들이 정치를 잘못하면 헌정회 회원들이 입을 열어야 한다"고 말한다. 요즘 그가 제일 걱정하는 것은 안보와 외교란다.

"미국을 등지고 주변 4강의 각축에서 어떻게 생존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외교란 말만 가지고 하는 게 아닙니다. 국력을 길러야지요. 국가를 대표하는 대통령의 말은 천금같으니 외교에선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송 회장에게는 두 가지 숙제가 기다리고 있다. 하나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회원들이 국가로부터 제대로 도움을 받도록 헌정회육성법을 정비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회관 마련. 송 회장과 함께 헌정회 활동에 주력해온 정재호.김영광 전 의원은 "헌정회가 56년이 되었는데 변변한 회관 하나 없다"며 "한국의 헌정사를 이끈 전직 의원들이 마지막 열정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