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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와 단교한 北...말레이 "北대사관 직원 철수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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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대북 제재 위반 혐의를 받는 북한 국적자를 미국으로 인도한 말레이시아와 외교관계를 단절하겠다고 선언했다. 미국을 향해서도 "대가를 치를 것"이라며 경고하며 대미 비난전을 본격화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6일 시·군 당 책임비서 강습회에서 연설하는 모습 [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6일 시·군 당 책임비서 강습회에서 연설하는 모습 [연합뉴스]

북한 외무성은 19일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발표한 '불의는 정의의 준엄한 심판을 면치 못한다'는 제목의 성명에서 "말레이시아 당국은 무고한 우리 공민을 ‘범죄자’로 매도하여 끝끝내 미국에 강압적으로 인도하는 용납 못 할 범죄행위를 저질렀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특대형 적대행위를 감행한 말레이시아와의 외교관계를 단절한다는 것을 선언한다"고 밝혔다.

북한 외무성 "무고한 우리 공민 범죄자로 매도" #이달 초 북한인 사업가 말레이서 미국으로 인도 #"미국은 응당한 대가 치를 것"...대미 비난전 계속 #말레이 정부 "48시간 내 대사관 인력 철수하라" #

북한이 언급한 '무고한 공민'은 말레이시아가 최근 미국에 인도한 북한인 사업가 문철명씨라고 말레이시아 외교부가 밝혔다. 지난 2019년 5월 미국 연방수사국(FBI)은 문씨가 대북제재를 위반해 술과 시계 등 사치품을 북한에 보냈고, 유령회사를 통해 돈세탁을 했다며 말레이시아에 신병 인도를 요청했다. 이에 따라 말레이시아 당국은 문 씨를 쿠알라룸푸르 외곽 아파트에서 체포했다. 이어 같은 해 12월 말레이시아 법원은 문 씨의 미국 인도를 승인했다.
문 씨는 계속해서 혐의를 부인하며 법원에 인도 결정 무효화를 요청했으나, 지난 9일 말레이시아 대법원은 최종적으로 문씨의 요청을 기각하고 그를 미국에 인도하라고 확정했다. 미 외교전문지 더 디플로맷은 당시 보도에서 "사상 처음으로 북한 국적자가 제재 위반 등 혐의로 미국으로 추방될 처지에 놓였다"며 "북한이 동남아를 비롯한 해외에서 벌이는 불법 행위에 대해 제재를 강력하게 적용하는 선례가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문 씨는 판결 이후 실제 미국으로 인도된 것으로 파악됐다.

북한 외무성은 이날 성명에서 말레이시아 당국의 판결에 대해 "터무니없는 날조이고 완전한 모략"이라고 주장했다. 외무성은 "문제의 우리 공민은 다년간 싱가포르에서 합법적인 대외무역 활동에 종사해온 일꾼"이라고 해명했다. 또 "여러차례 재판에서 우리 대표부와 변호사 측이 '불법자금세척'과 관련한 '혐의증거'를 제시할것을 말레이시아사법당국에 거듭 강력히 요구하였지만 그를 립증할만 한 똑똑한 물질적증거를 단 한번도 내놓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말레이시아 주재 북한대사관 [AP·뉴시스]

말레이시아 주재 북한대사관 [AP·뉴시스]

외무성은 또 이번 사건의 "배후조종자"이자 "주범"으로 미국을 지목하며 비난을 이어갔다. 자국 주민이 미국에 인도된 것은 "미국의 극악무도한 적대시 책동과 말레이시아 당국의 친미 굴욕이 빚어낸 반공화국 음모 결탁의 직접적 산물"이라며 "미국도 응당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또한 미국을 향해 "우리 국가의 최대주적인 미국"이라고 명시하는 한편 "지구상에서 가장 적대적인 조미(북·미)관계는 70여년동안 기술적으로 전쟁상태에 있으며 그것은 부정할수 없는 현실로 실증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북한은 앞서 16일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 담화, 18일 최선희 북한 외무성 제1부부장의 담화를 통해서도 미국을 향한 경고 메시지를 연이어 보냈다. 지난 17일~18일 미 국무·국방 장관의 첫 방한을 전후로 공개적인 대미 비난전에 나선 것이다. 북한 외무성의 이날 담화도 자국 주민이 제재 위반으로 제3국에서 미국으로 인도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 걸 명분 삼아 대미 비난전을 이어가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신범철 경제사회연구원 외교안보센터장은 "바이든 행정부 출범 후 한동안 침묵하던 북한이 최근 김정은의 승인 아래 사안별로 대미 메시지를 내며 여론전을 본격화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또한 동맹 관계를 중시하는 바이든 행정부가 대북 제재를 더욱 강화할 경우 그 피해가 고스란히 동맹 및 우호국에 돌아갈 수 있다는 메시지도 간접적으로 던진 것으로 보인다. 홍현익 세종연구소 수석위원은 "바이든 행정부의 새로운 대북 정책이 몇 주 내 완성되는 타이밍에 맞춰, 미국이 대북 제재를 강화할 경우에 대비해 경고 메시지를 보낸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은 지난 2017년 2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이복형 김정남이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암살된 뒤 말레이시아 당국이 북한 국적자 이정철을 유력 용의자로 체포했을 때도 북한 내 말레이시아 국민을 억류했을 뿐 단교 카드까지 꺼내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달 초 말레이시아 대법원 판결이 나온지 열흘만에 단교를 선언한 건 동남아를 비롯한 다른 국가에게 '미국 주도의 대북 제재에 동참할 경우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보낸 것이란 분석이다.

말레이시아 당국도 "북한의 결정에 따라 대응하는 것이 마땅하다"며 "쿠알라룸푸르 소재 북한대사관 직원들은 48시간 이내 말레이시아를 떠나라"고 맞대응했다. 말레이시아 외교부는 이날 보도자료를 통해 "북한이 외교 관계를 끊겠다고 한 데 대해 깊은 유감을 표시한다"며 "이는 비우호적이고 비건설적이며 국제사회의 상호 존중 정신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문철명의 추방은 정당한 사법 절차를 모두 밟은 뒤 이뤄졌으며, 법과 정의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현주 기자 park.hyunj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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