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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조가 있는 아침

(63) 삼동(三冬)에 베옷 입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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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유자효 시인

유자효 시인

삼동(三冬)에 베옷 입고
조식 (1501∼1572)
삼동에 베옷 입고 암혈(巖穴)에 눈비 맞아
구름 낀 볕 뉘도 쬔 적이 없건마는
서산에 해지다 하니 눈물겨워 하노라
- 병와가곡집

단성소(丹城疏)의 의기(義氣)

나의 생애는 추운 겨울에도 베옷을 입고 바위 굴에서 눈비를 맞았다. 구름 낀 볕 한쪽도 쬔 적이 없는데 서산에 해진다 하니 눈물이 난다.

남명(南冥) 조식(曺植)이 중종의 승하 소식을 듣고 읊은 시조다. 경상도 합천 출신의 남명은 두 차례의 사화를 경험하면서 훈척 정치의 폐해를 목격하고  산림처사로 자처하며 오로지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매진했다. 평생 벼슬을 거절하고 자유로운 몸으로 현실에 날 선 비판을 많이 가했다. 대표적인 글이 명종이 단성현감에 제수하자 사직하면서 올린 상소다. “전하께서 나랏일을 잘못 다스린 지 오래되어 나라의 기틀은 무너졌고 하늘의 뜻도 떠났으며 백성의 마음 또한 임금에게서 멀어졌다”며 명종을 “선왕의 외로운 후사(後嗣)”, 문정왕후를 “깊숙한 궁궐의 한 과부”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지금부터라도 학문에 힘써 덕을 밝히시고 백성이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일어서게 하시라”고 촉구했다. 상소를 받은 명종은 분개했으나 “선비의 언로가 막힌다”하여 벌주지 못했다.

일본을 경계한 남명의 걱정대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정인홍, 곽재우, 김면을 비롯한 그의 제자들이 신속하게 일어나 의병으로 왜군과 싸웠다.

유자효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