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흡기 뗀 의사 살인 방조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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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가 사망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알면서도 의사가 보호자의 요청에 못 이겨 퇴원을 허락할 경우 살인방조죄에 해당한다는 대법원의 첫 확정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 1부(주심 박재윤 대법관)는 가족의 요구에 따라 인공호흡기에 의존하던 환자를 퇴원시켜 숨지게 한 이른바 '보라매병원 사건'과 관련돼 기소된 의사 양모(42)씨와 수련의 김모(37)씨에게 각각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29일 밝혔다.

재판부는 "양씨 등이 환자를 집으로 후송하고 호흡 보조장치를 제거하는 등 살인 행위를 도운 점이 인정되는 만큼 살인방조범으로 처벌한 원심의 판단은 정당하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퇴원을 허용한 것은 환자의 생사를 가족의 보호의무 이행에 맡긴 것에 불과하므로 살인죄로는 처벌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이 판결에 대해 대한의사협회(의협)는 성명에서 "의식불명인 환자의 보호자 입장을 존중한 것에 살인방조죄를 적용한 것은 우리나라 의료 현실을 모르는 처사"라고 반발했다. 의협 권용진 대변인은 "회생하기 힘든 환자에 대해 보호자가 퇴원을 요청할 경우 이를 허용하지 않으면 가족들의 경제적 부담이 늘어나고 꼭 치료받아야 할 중환자들이 기회를 놓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병원이 돈 없는 환자들을 더욱 기피하게 되고 의사들이 자신들의 책임을 피하기 위해 불필요한 치료를 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보라매병원 사건
1997년 12월 4일 김모(당시 58세)씨가 만취한 채 넘어져 머리를 다쳐 서울시립 보라매병원에서 뇌수술을 받았다. 김씨는 인공호흡기에 의존하며 병세가 조금씩 호전됐다. 그러나 김씨의 부인 이모씨는 의사에게 "병원비를 감당하기 어렵고, 17년간 무위도식한 남편이 가족에게 짐"이라며 퇴원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

의사 양씨와 수련의 김씨는 "퇴원하면 바로 죽는다"며 극구 만류했다. 그러나 이씨가 워낙 강하게 요구하자 병원은 '사망하더라도 법적으로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서약서를 받은 뒤 퇴원시켰다. 김씨는 집에 도착해 인공호흡기를 제거한 뒤 5분여 만에 사망했다. 검찰은 98년 1월 양씨 등을 살인죄를 적용해 불구속 기소했다. 부인 이씨도 살인 혐의로 기소돼 2심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고 상고를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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