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따 피해 학생에 책임 물을 수 없다"

중앙일보

입력

학교에서 '집단 왕따'를 당하는 바람에 피해를 본 학생에게 '왕따'를 유발한 책임을 물어서는 안된다는 판결이 나왔다.

대전고법 민사1부(재판장 김영란 부장판사)는 11일 李모(당시 고1)군 가족들이 대전시와 가해학생 학부모 등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피고들은 연대해서 1억1천6백여만원을 배상하라"고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학교는 어느 조직보다 약자에 대한 보호와 배려가 절실히 필요한 곳이므로 李군의 성격이 왕따를 불러온 측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피해학생의 성격적 요인을 배상액 산정에 감안한다는 것은 손해배상의 법리에 어긋나고, 증거법적으로도 타당하지 않다"고 덧붙였다.

이번 판결은 피해 학생에게도 일부 원인 제공의 책임을 물어왔던 기존의 판례를 뒤집는 것으로, 학교생활에서 소극적이거나 내성적인 성격은 책임 유무를 따질 대상이 아니라 적극적인 보호의 대상이 돼야 한다고 판단한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재판부는 그러나 "李군의 부모는 자식의 학교 생활이나 심리 상태를 세심히 파악해 선생님이나 가해학생 부모에게 알려 피해를 줄이거나, 필요할 경우 전학 내지 정신과 상담을 받게 할 의무가 있는데도 이를 방치했다"며 이들에게 20%의 책임을 인정했다.

1심 재판부는 李군과 부모의 책임을 전체 피해액의 50%로 산정했었다.

내성적인 성격인 李군은 1998년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 같은 반 친구들로부터 머리가 크고 목소리가 특이하다는 등 이유로 왕따를 당해왔으며, 같은해 8월부터 등교를 거부하다 이듬해 9월 자퇴했다.

李군은 왕따를 당한 후유증 등으로 정신병 증세가 나타나 현재까지 치료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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