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추지 말고 뽐내라 화장실 '디자인 혁명'

중앙일보

입력

'감추고 싶은 천덕꾸러기에서 보이고 싶은 자랑거리로'.

화장실이 그렇게 변하고 있었다. 씻고 배설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집 한 귀퉁이에 두었던 화장실이 이제는 집주인의 취향을 드러내는 주거 공간의 주인공으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14일 막을 내린 제42회 이탈리아 밀라노 국제 가구 박람회는 화장실의 달라진 위상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현장이었다. 그동안 부엌가구는 물론 조명까지 밀라노 박람회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지만 화장실만은 한번도 초청받지 못했다.

그러나 화장실이 점차 원래의 서비스 기능에다 안락함을 추구하는 웰빙(wellbeing)의 공간으로 각광받으면서 처음으로 화장실 관(館)이 마련됐다.

밀라노에서 엿볼 수 있는 화장실 인테리어의 신 경향은 '감추기보다 드러내기'다. 그런 만큼 색상과 디자인이 대담해졌다. 불경기의 여파로 다른 가구 색깔이 어두워지고 단순해진 것과는 대조적이다.

또 과거엔 평범한 화장실을 돋보이게 하는 게 타일이었다면 이제는 위생 도기와 수도 꼭지,샤워기가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정확한 대칭을 이루는 흰색 세라믹 도기는 이곳 밀라노에선 오히려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다.

대신 첨단 소재를 사용해 현란한 색을 쓰거나 비대칭적인 모양으로 디자인 감각을 한껏 뽐낸 도기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이런 신 경향을 가장 잘 보여준 곳은 이탈리아 '라스펠'사의 부스. 인테리어 디자이너 마르코 피바와 마테오 순이 디자인한 라스펠의 도기들은 화장실의 개념을 뒤흔들 만큼 혁신적이다.

꽃잎 모양에서 영감을 받은 라스펠사의 '밀로스'세면대는 그 자체로도 돋보이지만 사용자가 몇개를 퍼즐식으로 연결해 자유자재로 원하는 모양을 만들 수 있는 게 특징이다.

세면대는 고정된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깨는 '케아' 세면대도 인상적이다. 한쪽이 깊은 비대칭형의 모양이며 배수구 위치를 중심축으로 3백60도 회전할 수 있다.

흑백과 빨강.노랑.주황 등 강렬한 원색을 대비시킨 '리스펙트' 역시 신개념 욕실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리스펙트는 새로 생긴 러시아 회사지만 미국 듀폰사의 최첨단 소재인 코리안(Corian) 상판(인조 대리석)과 이탈리아의 디자인을 결합해 유럽 못지 않은 감각을 보여줬다.

국내에서는 부엌 상판에 주로 쓰이는 코리안 소재가 이곳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세면대로 변신했다. 수전(水栓)위치에서부터 세면대를 거쳐 다리까지 틈새없이 하나로 연결된 외형의 '실루엣'은 코리안의 특성을 가장 잘 살리고 있다.

커피 잔 모양에서 따온 '비컵'세면대의 다양한 컬러 역시 코리안 소재가 아니었으면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다. 실루엣을 디자인한 이탈리아 디자이너 안토넬라 스카르피타가 "코리안 소재가 갖는 다양한 변신 가능성과 수십가지 컬러를 활용하는 데 중점을 뒀다"고 말할 정도였다.

누웠을 때 편안하게 목을 받쳐주는 라스펠사의 '라바스카' 욕조는 아몬드 껍질 가루로 만든 두랄몬드라는 신소재로 만들어 매우 가벼운 게 특징이다. 두랄몬드는 목재의 장점을 갖춘데다 플라스틱처럼 가공할 수 있어 최근 각광받고 있다고 한다.

밀로스.케아 세면대는 나무의 송진과 광석을 섞은 크리스탈플랜트라는 복합물질로 만들었다. 혁신적일 뿐 아니라 재활용이 가능한 자연친화적인 신소재들은 욕실뿐 아니라 다른 가구에도 점차 적용될 전망이다.

이번 박람회에 출품된 혁신적인 디자인들은 이처럼 새로운 소재 덕분에 나온 것이 많았다. 혁신적인 디자인이 새로운 소재 개발에서 온다는 것을 확인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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