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일 벗는 두뇌의 신비] 9. 중독의 원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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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말이 있다. 목을 내민 자라에게 놀랐던 기억이 그 자체로는 놀랄 이유가 없는 솥뚜껑에 새로이 놀라게 하는 힘을 주게 됐다는 얘기다. 과학자들은 이를 '조건화됐다'고 하고, 이때 나타나는 반응을 조건반응이라고 부른다.

조건반응을 처음 확인한 것은 러시아의 생리학자 파블로프다. 그는 개에게 먹이를 주기 전에 늘 종을 울렸다.그러자 나중에는 종소리만 들어도 개가 침을 흘린다는 사실을 관찰했다. 개가 학습을 통해 종소리와 먹이를 연관시키므로 종소리만 들어도 먹이에 대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약물 중독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난다. 칸막이가 있는 상자 안에 쥐를 넣고 한쪽 장소에서는 중독성 약물을, 다른 한쪽 장소에서는 생리 식염수를 반복하여 주는 실험이 있다.

이를 어느 정도 반복한 뒤 약물을 없애고 칸막이를 열어 두 장소 가운데 하나를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하면, 전에 약물을 먹었던 장소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뿐만 아니라 그 장소에서 마치 약물을 먹었을 때처럼 이리 저리 움직이며 무언가를 찾으려는 행동을 많이 보인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일정 기간 코카인을 끊은 중독자에게 코카인과 관련된 장소나 물건의 영상을 보여주면 자연 풍경을 보여줬을 때와는 달리 '편도핵'이라는 뇌 부위의 활동이 크게 늘어난다.

편도핵은 감정과 관련된 기억을 저장하며, 우리 뇌에서 행동 결정에 관여하는 '대뇌보상계'라는 부분에 영향을 준다.

코카인 비디오만 보고도 편도핵의 활동이 늘어나는 것은 코카인에 대한 기대감이 매우 높아졌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렇게 사람도 무엇에 중독될 때 주변 환경에 대한 조건화가 같이 일어날 수 있으며, 이것이 나중에 중독을 재발시키기도 한다.

일단 중독이 되면 뇌의 여러 부위에서 구조와 기능의 변화가 나타난다. 예를 들어 뇌의 '선조체'란 곳에서 발현되는 도파민 수용체의 한 종류를 보면, 중독자가 코카인을 끊고 여러 달이 지난 뒤에도 정상보다 적은 양이 발현된다.

아마도 그 결과 중독자는 자기 조절 능력을 잃고 코카인에 대한 강박 증상을 보일지도 모른다고 과학자들은 생각한다. 이렇게 정상이 아닐 정도로 중독에 의해 변화된 뇌를 원상태로 되돌려 놓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스트레스도 중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실험실에서 동물에게 반복해서 스트레스를 주면, 그렇지 않은 동물에 비해 약물 중독이 쉽게 일어난다. 스트레스 대신 스트레스 호르몬을 투여해도 같은 효과가 나타난다. 이 때 이 호르몬의 작용을 차단하면 효과가 사라진다.

사람이 받는 스트레스는 매우 복잡 다양하다. 직업에 대한 불안감, 인간 관계, 일의 중압감 등. 이같은 육체적.정신적 스트레스는 사람들이 중독의 위험에 빠지는 것을 돕는다.

어릴 때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은 경우 성인이 되어서 약물 등에 중독될 가능성이 더 크다는 보고도 있다. 또 약물을 끊은 중독자라도 스트레스가 높아지면 다시금 약물을 찾는 경향이 증가한다는 사실은 스트레스와 중독과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다양하고 진정한 뇌의 기쁨보다는 단순히 쾌락만을 추구하려는 욕구와 여러 가지 형태의 과중한 스트레스가 같이 맞물렸을 때 나타나는 필연적인 결과들이 어쩌면 오늘날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중독이라는 이름의 병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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