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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칠곡 가시나들' 서체 나온다…한글 배워 시집 낸 할매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12월 중 칠곡할매 서체 등장 

한글을 배워 시를 쓰는 칠곡할매들. 한 할머니가 연필로 손글씨를 쓰고 있다. [사진 칠곡군]

한글을 배워 시를 쓰는 칠곡할매들. 한 할머니가 연필로 손글씨를 쓰고 있다. [사진 칠곡군]

'공부시간이라고/일도 놓고/헛둥지둥 왔는데/시를 쓰라 하네/시가 뭐고/나는 시금치씨/배추씨만 아는데.’ -소화자 할머니의 ‘시가 뭐고?’ (2015년 10월 1집『시가 뭐고?』수록)

 '나는 백수라요/묵고 노는 백수/콩이나 쪼매 심고/놀지머/그래도 좋다. -이분수 할머니의 '나는 백수라요' (1016년 10월 2집『콩이나 쪼매 심고 놀지머』수록)

 '내친구 이름은 배말남 성주댁/얼구리 애뻐요/성주댁 이를 잘해요/친구가 있어 조아요. - 권영화 할머니의 '옆자리 친구' (2018년 11월 3집『내친구 이름은 배말남 얼구리 애뻐요』수록)  

칠곡할매들이 낸 시집에 수록된 시. [사진 칠곡군]

칠곡할매들이 낸 시집에 수록된 시. [사진 칠곡군]

 군데군데 맞춤법이 틀렸다. 삐뚤빼뚤한 글씨체, 문법도 꼼꼼하게 보면 틀린 게 많다. 시구의 ‘절제의 미학’과는 거리가 멀다. 아예 투박하기까지 한 표현들. 이런 시집이 2015년부터 2018년까지 벌써 3권이나 발간돼 인기 속에 팔렸다.

 글쓴이들은 모두 경북 칠곡군 25개 시골 마을에 사는 할머니들. 한글을 깨우친 기념으로 시를 지었고 그 순수한 감성이 들어있는 할머니들의 시를 책으로 묶어 발간했다. 시 쓰는 칠곡할매들은 지난해 다큐멘터리 영화 '칠곡 가시나들'로도 알려졌다.

 한글을 막 깨우쳐 삐뚤빼뚤하면서, 어린이 같은 글씨를 쓰는 칠곡할매들의 손글씨가 '서체'로 개발된다. 유명인이나 역사적인 인물이 아닌 시골에 사는 할머니들의 손글씨가 서체로 만들어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글을 배워 시를 쓰는 칠곡할매들. [사진 칠곡군]

한글을 배워 시를 쓰는 칠곡할매들. [사진 칠곡군]

 칠곡군이 주관해 개발 중인 서체 이름은 '칠곡할매 서체'다. 한글을 깨우쳐 시를 쓴 할머니들 가운데 5명을 선정해 각각 다른 5개의 칠곡할매 서체를 만들고 있다.

 1집 『시가 뭐고?』에는 칠곡할매 89명이 참여했고, 2집엔 119명, 3집엔 92명의 할매들이 참여해 시를 지었다. 칠곡군엔 한글을 배웠거나, 배워야 할 할머니가 400명 정도 거주한다.

 칠곡군 교육문화회관 한석현 담당은 "한글과 알파벳으로 각각 만들고 있고, 다음 달 초에 공개돼 무료 배포 예정"이라며 "칠곡지역 특산물 포장지 서체로 활용하고, 칠곡군 홍보 문구에도 쓸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시 쓰는 칠곡할매들은 올해 시집을 내지 않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코로나19) 감염증 확산 방지 활동에 집중했다고 한다.

 칠곡군 왜관읍에 사는 이학연 할머니는 '젊은 야들야 잘지내나/코로나 끝나면 나중에 놀러온나/할매가 오이와 토마토 주스 만드러주께/우야든지 건강조심해레이.' 라고 쓴 코로나19 극복 편지를 작성, 공익 캠페인 자료로 배포했다.

 '언텍트 추석 보내기 캠페인'을 하면서 칠곡할매들은 손글씨로 '야들아 이번 추석에 오지 마라'는 내용을 푯말에 적고, 이를 직접 들고 홍보 영상에 등장하기도 했다.

준비 중인 4집은 편지글 중심 검토

2015년 1집 시집 발간 당시 본지 기자가 직접 현장에서 촬영한 할머니들. [중앙포토]

2015년 1집 시집 발간 당시 본지 기자가 직접 현장에서 촬영한 할머니들. [중앙포토]

 칠곡할매들을 세상에 알린 건 2008년부터 마을별로 운영 중인 칠곡군 '성인문예반'이다. 일주일에 한두 차례 모여 한글을 배우고, 시를 쓰는 일종의 어르신 평생교육 프로그램이다. 2015년 당시 칠곡군은 할머니들이 한글을 배우면서 지은 시 98편을 성인문예반에 보관해 뒀다.

 이걸 우연히 지역 문인들이 봤다. "감성이 예쁘다"고 평했다. 그래서 이를 묶어 첫 시집을 내게 됐다. 이 시집이 이른바 '대박'이 났다. 교보문고와 인터넷 서점에 권당 정가 9000원에 내놨는데 2주일 만에 다 팔렸다. 순수한 시골 할머니들이 솔직한 눈으로 바라본 그들만의 세상에 독자들이 매력을 느낀다는 평가가 줄을 이었다.

 칠곡할매들은 서체 개발 후 4집 준비에 들어갈 계획이다. 4집은 시집이 아니라 편지글을 묶은 책으로 발간할지를 검토 중이라고 성인문예반 측은 설명했다. 앞서 발간한 모든 시집처럼 4집 역시 판매 수익금은 전액 장학금으로 기부할 방침이다.

칠곡=김윤호 기자
youknow@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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