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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훈 조각, 세계 거장과 나란히…美휴스턴미술관 파격 선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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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휴스턴미술관 새 건물 앞에 설치된 최병훈 작가의 '선비의 길'. Richard Barnes 촬영. [사진 MFAH]

미국 휴스턴미술관 새 건물 앞에 설치된 최병훈 작가의 '선비의 길'. Richard Barnes 촬영. [사진 MFAH]

현대건축 거장 스티븐 홀(Steven Holl·73)이 설계해 21일 개관한 미국 휴스턴미술관(Museum of Fine Arts, Huston·MFAH) 신관에 한국 아트 퍼니처 디자이너 최병훈(68·전 홍익대 미대 학장)의 조각 '선비의 길(Scholar's way)'이 영구 설치됐다. 세계적인 작가 올라퍼 엘리아슨, 아이 웨이웨이 등과 나란히 미술관 의뢰를 받아 작품을 만들었으며, 그곳 영구 소장품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스티븐 홀 설계 신관에 작품 설치 #엘리아슨, 아이 웨이웨이와 나란히 #지난 21일 개관, 관람객에 첫 공개

세계 건축·디자인 전문매체 디자인 붐(designboom) 보도에 따르면 휴스턴미술관은 최근 대대적인 확장·증축 공사를 마치고 근현대미술관 건물인 '낸시 앤 리치 카인더빌딩(The Nancy and Rich Kinder Building)'을 개관했다. 이와 함께 새 건물 내외부 공간에 맞게 작가들에게 의뢰했던 '장소 맞춤형' 커미션 작품(Commissioned work·기관이나 개인이 작가에게 직접 제작을 의뢰하는 작품)도 공개했다. 커미션 작품엔 최 작가와 엘리아슨, 웨이웨이 외에도 아프리카를 대표하는 현대미술가 엘 아나 추이, 베네수엘라 출신의 카를로스 크루즈-디에스 등 세계 '거장'급 작가 8명이 참여했다.

조각과 아트 퍼니처, 경계를 허물다 

최병훈의 아트 퍼니처 '태초의 잔상'. 018-504, 2018,basalt.1930x820x770cm.[사진 작가 제공]

최병훈의 아트 퍼니처 '태초의 잔상'. 018-504, 2018,basalt.1930x820x770cm.[사진 작가 제공]

최병훈, 태초의 잔상 017-482, 2017, basalt,1600x800x750cm,  [사진 작가 제공]

최병훈, 태초의 잔상 017-482, 2017, basalt,1600x800x750cm, [사진 작가 제공]

최병훈, 태초의 잔상 015-430, 2015, basalt, 3,700x880x550cm.[사진 작가 제공]

최병훈, 태초의 잔상 015-430, 2015, basalt, 3,700x880x550cm.[사진 작가 제공]

최병훈, 태초의 잔상, 9637, 1996,1750x540x430cm. 1,470x380x420cm 900x460x410cm. hard maple. natural stone. 배병우 촬영.[사진 작가 제공]

최병훈, 태초의 잔상, 9637, 1996,1750x540x430cm. 1,470x380x420cm 900x460x410cm. hard maple. natural stone. 배병우 촬영.[사진 작가 제공]

홍익대 목조형가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미대 학장을 거친 최병훈은 국내 아트 퍼니처(Art Furniture)의 선구자다. 아트 퍼니처는 그 자체로 감상용 예술 오브제가 되기도 하지만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가구를 말한다. 대량생산품과 전통공예품만이 가구로 여겨지던 1980년대부터 그는 예술과 결합한 가구 디자인으로 제3의 길을 개척해왔다. 독일 비트라 디자인미술관,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프랑스 파리 국립장식미술관, 홍콩 M+미술관이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휴스턴미술관은 조각가가 아닌 가구 디자이너에게 조각 제작을 의뢰한 셈이다. 우리 미술계에선 쉽게 일어나지 않는 '파격'이다. 미술관 측이 오로지 '작품성'에만 초점을 맞춰보았기에 가능한 일이다. 아트 퍼니처에 40년 이상의 시간을 바쳐온 그를 순수미술을 다루는 미술관 측에서 먼저 '아티스트'로 인정한 것이다.

이번 프로젝트는 휴스턴미술관 큐레이터가 2014년, 2016년 미국 뉴욕의 프리드먼 벤다 갤러리에서 열린 그의 아트 퍼니처 전시를 눈여겨본 게 계기가 됐다. 최 작가는 "2016년 전시 때 휴스턴미술관 큐레이터가 찾아와 '2년 전부터 당신 작업을 지켜봐왔다'고 말했다"며 "이듬해인 2017년 7월 게리 틴터로(Gary Tinterow) 관장으로부터 공식적으로 작품을 의뢰를 받았다"고 전했다. 이어 "미술관 측에서 조각 작품을 만들어달라고 해 저 자신도 깜짝 놀랐다"면서 "디자인과 순수미술의 경계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우리나라에선 쉽게 일어나지 않은 일이라 얼떨떨했고, 또 굉장히 설렜다"고 말했다.

옛 수석에서 영감 얻어  

지난해 최병훈(왼쪽) 작가 작업실을 찾은 미국 휴스턴미술관 신디 스트라우스 큐레이터. [사진 작가 제공]

지난해 최병훈(왼쪽) 작가 작업실을 찾은 미국 휴스턴미술관 신디 스트라우스 큐레이터. [사진 작가 제공]

최병훈 작가가 한지에 먹으로 작업한 '선비의 길' 초안 드로잉 중 하나. [사진 최병훈]

최병훈 작가가 한지에 먹으로 작업한 '선비의 길' 초안 드로잉 중 하나. [사진 최병훈]

현대 건축 거장 스티븐 홀이 설계한 미국 휴스턴미술관 카인더 빌딩. 서쪽 입구 앞에 놓인 최병훈 작가의 조각 작품이 보인다. Richard Barnes 촬영.[사진 MFAH]

현대 건축 거장 스티븐 홀이 설계한 미국 휴스턴미술관 카인더 빌딩. 서쪽 입구 앞에 놓인 최병훈 작가의 조각 작품이 보인다. Richard Barnes 촬영.[사진 MFAH]

그의 조각 '선비의 길'은 높이 3m, 가로 70㎝에 달하는 3개의 높은 기둥 형상이다. 재료는 인도네시아산 현무암(Basalt)을 썼다. "겉은 흑갈색이고 속은 진한 검정으로, 거친 원시성(표면)과 매끈한 현대성(내부)을 함께 표현할 수 있어서"다. 작품은 미술관 서쪽 입구 13.5m, 4m 규모의 얕은수면 공간 위에 설치됐다. 2017년 7월 현장답사부터 공간 리서치, 작품 방향과 규모에 대한 논의를 거쳐 완성하기까지 총 2년 6개월이 걸렸다.

그런데 왜 작품 제목을 '선비의 길'이라 했을까. 그는 "옛 한국의 선비문화인 수석(壽石·Scholar's Rocks)에서 작품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자연으로부터 오는 수석의 오묘한 형상은 음양으로 이뤄진 대자연의 이치를 품고 있다"면서 "옛 선비들이 수석을 정원과 서재 등에 설치해 교감하며 인격을 수양하던 문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고 설명했다. 높은 이상과 꿋꿋한 신념을 추구하는 정신을 높이 치솟은 높은 기둥 형태에 있는 힘찬 능선과 깊이 팬 계곡과 구멍들로 표현했다는 설명이다.

초기 드로잉은 한지에 먹으로 그렸고, 이후 연필 소묘로 완성했다. 평면 소묘를 입체화하기 위해 1/10 크기로 축소해 모형도 만들었다.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내 작품 의 폭을 확장할 수 있어서 무엇보다 좋았다"고 말하는 그는 "내게 이번 작업은 장르의 틀을 넘어섰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기회였다. 제가 앞으로 작가로서 더 성장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 믿는다"고 말했다.

"자기를 믿고 꿋꿋이 나아가라"  

자신이 작업한 아트 퍼니처 작품에 앉아 있는 최병훈 작가.[사진 작가 제공]

자신이 작업한 아트 퍼니처 작품에 앉아 있는 최병훈 작가.[사진 작가 제공]

최병훈, 태초의 잔상, 08-282. 2008. 1,630x550x980cm, carbon fiber, glass fiber, vinyl ester resin, balsa, black granite.[사진 작가 제공]

최병훈, 태초의 잔상, 08-282. 2008. 1,630x550x980cm, carbon fiber, glass fiber, vinyl ester resin, balsa, black granite.[사진 작가 제공]

돌과 나무 등을 주재료로 작업하는 최병훈은 작품에 도(道)와 선(禪) 그리고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담아 자연스럽고, 간결한 조형으로 빚어낸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화려하지 않고, 자연스러우면서 일본·중국의 것과는 확연히 다른 한국적 아름다움을 보여준다는 것. 2016년 파리에서 전시를 열었을 때 올리비에 가베 파리 국립장식미술관장은 최병훈의 작업을 "한국성(Koreanism)의 활력과 독창성"으로 요약했다. 가베 관장은 "최병훈은 예술적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작업 자체로 자신의 창조성을 드러낸다. 그의 작품들은 경계 허물기, 즉 개방성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이야기한다"고 썼다. 휴스턴미술관 측도 최병훈 작품에 깃들어 있는 '한국성'을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2017년 8월에 정년으로 퇴임한 최 작가는 여전히 '현역'이다. 내년에 개관할 서울공예박물관을 위한 작품을 최근 완성해 설치했고, 미국 프리드먼 벤다 갤러리, 프랑스 파리 다운타운 갤러리를 통해서도 컬렉터들의 작품 의뢰가 이어지고 있다. 그는 "작가인 내게 은퇴는 또 하나의 시작일 뿐이다. 저 자신도 내 작업이 어디로, 어떻게 진화할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이어 젊은 창작자들에게 주고 싶은 조언을 묻자 "무엇보다 자신을 믿어라. 장르의 벽을 의식하지 말고, 남과 다른 나만의 것으로 도전하고 또 도전하라고 말해주고 싶다"고 했다.

'빛의 건축가' 스티븐 홀이 설계한 미 휴스턴 미술관. 휴스턴의 최고 랜드마크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Richard Barnes 촬영. [사진 MFAH]

'빛의 건축가' 스티븐 홀이 설계한 미 휴스턴 미술관. 휴스턴의 최고 랜드마크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Richard Barnes 촬영. [사진 MFAH]

한편 휴스턴 시의 '뮤지엄 구역(Museum District)' 중심에 있는 휴스턴미술관은 1990년에 설립됐다. 대지 규모가 14에이커(약 1만 7000평)에 이른다. 이번에 새로 지어진 건물은 지하 2층 지상 3층 규모이며 건물 면적이 23만7200제곱피트(총 6700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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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주 문화선임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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