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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일 벗는 두뇌의 신비] 1. 언어

중앙일보

입력

우리가 말을 할 때 머리 속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기억과 판단을 할 때, 희로애락을 느낄 때, 착각을 하고 꿈을 꿀 때는 또 어떨까. 과학의 힘으로 서서히 베일을 벗고 있는 두뇌의 신비를 시리즈로 알아본다.

미국의 소프라노 가수 글로리아 렌호프(46)는 25개 국어로 된 노래 2천5백여 곡을 자유자재로 부른다. 발음 또한 정확하기로 정평이 있다.

이 얘기만 들으면 모두 렌호프가 엄청난 천재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IQ는 55다. 뇌에 이상이 생기는 '윌리엄스 증후군' 환자인 렌호프는 간단한 덧셈.뺄셈도 못한다. 그래도 언어 능력만큼은 탁월하다.

윌리엄스 증후군에 걸리면 두뇌의 다른 기능은 떨어지지만 말은 여전히 유창하게 한다. 이는 기억이나 판단.추리를 할 때와 말을 할 때의 두뇌 활동이 뭔가 크게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는 증거다.

기억이나 판단을 하는 부분은 두뇌 이곳 저곳에 퍼져 있는 반면 언어와 관련된 일은 왼쪽 두뇌가 담당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 중에서도 대략 관자놀이 부근에 있는 '브로카'라는 부분과 그보다 약간 뒤쪽 귀 근처의 '베르니케'영역이 언어와 깊은 관계가 있다. 이 부분들을 이른바 '언어중추'라 한다.

사고를 당해 베르니케 부분이 망가지면 단어 하나하나는 무슨 뜻인 지 알지만 문장의 뜻은 이해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나는 네가 어머니와 시장에 가는 것을 보았다"고 하면, 시장에 간 것이 누구인 지 이해하지 못한다.

브로카 영역을 다치면 말을 더듬거리기도 하며, 특히 단어들을 제대로 연결 못해 "나…너…어머니…시장…가…"처럼 얘기한다. 지금까지의 연구에 따르면 보통 사람은 모국어를 구사하는 기능이 태어나서 4~5년 안에 갖춰진다. 두뇌는 태어난 뒤 신경세포(뉴런)들이 이리저리 연결되면서 기능을 할 수 있게 되는데, 언어와 관련된 기본 연결망은 생후 4~5년 안에 형성되는 것이다.

그 후에도 브로카.베르니케 영역의 뉴런 연결망이 조금씩 확장되며 언어 중추가 발달하지만, 사춘기에 이르면 완성돼 그 뒤에는 언어중추의 구조가 거의 바뀌지 않고, 언어도 배울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학설이다.

몇몇 증거도 있다. 1797년 프랑스에서 이른바'늑대소년'이 발견됐다. 문명과 동떨어진 야생의 이 소년은 발견 당시 열살이 훨씬 넘었을 것으로 추정됐다. 사람들은 그에게 말을 가르치려 노력했다. 그러나 소년은 그림을 들이대면 이름을 대는 정도에 그쳤을 뿐 끝내 제대로 말을 하지는 못했다.

70년대 미국에는 제니라는 어린이가 있었다. 13세가 될 때까지 부모는 제니를 침대에 묶어 놓고 먹이기나 할 뿐 전혀 돌보지 않았다. 당연히 말도 익히지 못했다. 결국 제니도 평생 언어를 구사할 수 없었다.

모두 두뇌의 언어 중추가 더 이상 발달할 수 없는 나이에 이르기까지 언어를 배우지 못해 영영 말을 할 수 없게 된 경우다. 그렇다면 나이가 들어서도 외국어를 익힐 수 있는 것은 어떤 까닭일까. 여러 나라의 수도 이름을 외우듯 모국어를 바탕으로 '학습'을 하는 것이다. 때문에 보통 사람이 외국어를 할 때는 두뇌의 언어중추뿐 아니라 학습과 관련된 부분도 많이 활동하게 된다.

실제 한국어와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두 사람을 놓고 실험을 했다. 한 사람은 어려서 영어를 사용하는 나라에서 자라며 마치 모국어를 배우듯 영어를 익혔고, 다른 사람은 한국에서 자란 뒤 영어를 배웠다.

이 두 사람이 각각 한국어와 영어를 할 때 두뇌의 어떤 부분이 활성화되는지, 기능성 자기공명영상(fMRI)을 찍어 봤다. 그랬더니 외국에서 자란 사람은 한국어든 영어든 활성화 부위가 거의 같았는데,한국에서 큰 사람은 영어를 할 때 활성화되는 부위들이 훨씬 더 많았다.

특히 한국어를 할 때 별로 안 쓰는 오른쪽 뇌가 활발히 활동했다. 이는 학습 등을 할 때 많이 쓰이는 부분이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외국어를 사용하는 환경에 자연스럽게 노출되느냐, 아니냐만이 대뇌의 언어 활동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외국어를 뒤늦게 배웠더라도 아주 능숙하게 되면, 대뇌의 활동이 어릴 때 익힌 사람과 거의 비슷하게 된다는 보고도 있다. 하지만 이런 결과가 이론으로 정립된 것은 아니다. 아직 외국어 능력과 두뇌에 대한 연구는 전 세계적으로 초보 수준에 머물러 있는 상황이다.

◇ 왼쪽 두뇌와 언어 처리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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