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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 상당수 북부에서 남·서부로 이주…민주·공화 ‘텃밭’ 바뀌어 판세에 큰 영향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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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0호 03면

미 바이든 시대 눈앞 

5일 애리조나주 피닉스에서 극우단체 회원들이 트럼프 지지 시위를 하고 있다. [AP=뉴시스]

5일 애리조나주 피닉스에서 극우단체 회원들이 트럼프 지지 시위를 하고 있다. [AP=뉴시스]

2020년 미국 대선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대표적 사례로 미국 역사에 남을 전망이다. 1845년 미 의회가 정한대로 11월의 첫째 월요일이 지난 첫째 화요일에 치러져 왔던 미 대선은 이미 마무리됐어야 했지만 코로나 팬데믹 영향력은 실로 엄청났다. 감염 우려로 유권자 두 명 중 한 명이 사전 우편투표를 마치는 기록을 세웠지만 선거제도와 규정 정비는 주마다 확연히 달랐다.

양극화 심화, 정책보다 감정싸움 #이념 다른 유권자들 철저히 외면 #두 당 모두 혁신 목소리 커질 듯 #견제·균형 복원 미 국민에 달려

2000년 대선 과정에서 투표용지 부실로 오점을 남겼던 플로리다는 이후 나름 제도 개선을 추구해 왔고 선거인단 3위 규모의 많은 인구에도 불구하고 이번엔 비교적 신속히 개표 결과를 공표할 수 있었다. 이에 비해 중서부 주들은 선거 당일까지 우편투표 개봉과 개표를 금지함으로써 코로나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이전 방식을 고수했다. 덕분에 여론조사와 달리 또 한 번 트럼프에게 패배한 줄 알았던 바이든 지지자들이 역전승을 기대하는 중이기는 하다. 이처럼 이번 대선 또한 미국 정치 변화와 연속의 연장선상에 있다.

무엇보다 올해 대선은 미국 정치와 사회의 분열 양상이 더욱 심해졌음을 보여줬다. 각자 다른 정책 대안을 통해 경쟁하는 두 정당을 유권자들이 선택하고 책임정치를 실현하자는 게 1950년 미국정치학회 권고 사항이었다. 양극화라는 나쁜 어감에도 불구하고 정당 간의 분명한 차이와 내부 단합은 대의민주주의 완성도를 높이는 것으로 평가될 수도 있다. 그런데 큰 정부냐 작은 정부냐를 두고 벌이던 정책 중심의 전통적 논쟁 지형에서는 벗어난 지 오래다.

문제는 정당정치를 정책 경쟁이 아닌 감정싸움으로 둔갑시키는 경우 양극화는 결국 나쁜 현실이 된다는 데 있다. 대신 나와 지지 정당이 다른 사람은 이 나라에 해악이란 분위기가 만연해 있다. 결정적으로 이익만 좇는 이념 편향적 미디어는 같은 성향의 시민들만 결속시키고 다른 성향의 유권자들은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실제로 이번에도 선거 예측이 맞아떨어지지 않은 배경에는 보수 유권자들의 여론조사 응답 회피가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소 이르지만 이미 드러난 지지율 변화를 살펴보면 트럼프를 지지하던 곳은 더 강력히 트럼프를 지지했고 트럼프를 혐오하던 곳은 더 세게 트럼프를 반대한 것으로 나타난다. 구체적으로 2008년과 2012년 오바마에 투표하고서도 2016년에 트럼프로 갈아탄 소위 ‘오바마-트럼프’ 유권자들은 이번에 더욱 트럼프 쏠림 현상을 보였다.

예를 들어 2016년 위스콘신주 키노샤 카운티는 단 255표 차이로 힐러리 대신 트럼프를 선택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트럼프에게 거의 10배에 가까운 2700표 차이의 승리를 안겨줬다. 트럼프가 양극화를 노골적으로 부추겼고 바이든의 통합 메시지는 공감에 실패한 것으로 읽힐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2016년 트럼프 승리가 우연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고 평가할 수 있다. 물론 진보 유권자들은 기후변화와 의료보험을 경시하는 대통령과 공화당을 이전보다 더 확실하게 퇴짜 놓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변화의 조짐 또한 두드러진 선거였다. 거대 양당 시스템인 미국에서 한 정당의 득세는 다른 정당의 쇠락을 의미할 때가 많다. 필자는 학위 논문에서 1860년 당선된 링컨을 필두로 노예 해방과 평등 시민권을 외쳤던 공화당이 어떻게 20여 년 뒤인 1882년 중국인 노동자들을 10년간 입국 금지하는 법안에 찬성했는지를 다룬 적이 있다. 존슨 대통령이 암살당한 케네디 유지를 받들어 1964년 흑인 인권법에 서명하면서 민주당은 백인 중심 남부를 포기했다고 중얼거린 일화도 유명하다.

또한 19세기 말 보호무역을 옹호했던 공화당은 20세기 말 자유무역 신봉 정당으로 변모했고, 민주당은 베트남 전쟁 실패 이후 총(안보)과 버터(복지)를 동시에 잡으려던 이전 입장에서 복지 우선으로 바뀌었다. 트럼프 4년 동안 공화당은 보호무역 정당과 이민 반대 정당으로 바뀐 듯 보이지만 포스트 트럼프 시대를 지켜봐야 정당 변화는 확증할 수 있다.

역설적으로 변화는 주로 남부를 비롯한 전통적인 공화당 강세 지역에서 감지되고 있다. 주 내부의 자연스러운 인종 구성 변화와 세대교체 못지않게 중요한 변인은 바로 미국 국민의 이주 경향이다. 평균 5년에 한 번 정도 거주지를 옮긴다고 알려져 있는 미국 사람 중 상당수가 북부에서 남부와 서부로 이사하는 추세는 이미 오래됐다. 따뜻한 날씨와 낮은 물가를 찾아 남부와 서부로 이주한 이들이 함께 가지고 간 것은 민주당 지지 성향이었다.

1992년 남부 출신인 빌 클린턴 후보를 찍은 이래 줄곧 공화당 후보만 선택해 왔던 조지아가 이번에 박빙의 승부를 보인 이유는 바로 북부에서 이사해 온 이주민들이 대거 민주당으로 기운 탓이 크다. 또 다른 격전지인 노스캐롤라이나가 2008년 32년 만에 민주당 후보인 오바마를 뽑은 것도 마찬가지 범주에 속한다. 1996년 이래 공화당 텃밭이었던 애리조나가 이번에 바이든 쪽으로 넘어간 배경에도 민주당 지지 성향인 캘리포니아에서 많은 사람들이 옮겨간 게 작용했다.

두 정당 모두 내부에서 터져 나올 새로운 변화와 반성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여 볼 필요가 있다. 우편투표 개표로 막판에 힘겹게 역전 중인 민주당에서는 이제 더 이상 트럼프 반대 전략만으론 충분치 않다는 주장이 등장할 전망이다. 민주당이 집권하면 어떤 세상을 만들 것인지를 유권자들에게 분명히 각인시켜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는 주로 샌더스 계열 의원들이 주도할 것으로 보인다. 그런 만큼 온건파 바이든이 대통령에 취임하더라도 민주당 내부 노선 투쟁은 더욱 치열해질 것이다. 선거 승리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경합 지역 출신 중도파와 담대한 변화를 열망하는 혁신파 간의 경쟁 및 협력이 향후 미국 정치 판세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공화당의 사정은 훨씬 더 복잡하다. 2024년 대선을 놓고 백인 지지층 중심의 트럼프식으로 다시 한 번 도전할 것인지, 아니면 점점 더 중요해지는 라티노 유권자 포섭 전략으로 옮겨갈 것인지 내부 논의가 분분할 것이다. 물론 2024년에 78세가 되는 트럼프가 미국 역사책의 행보를 답습할 수도 있다. 1884년 당선됐던 클리블랜드 대통령은 1888년 해리슨 후보에게 지고 난 뒤 1892년 재대결에 나서 백악관에 복귀한 적이 있다. 과연 견제와 균형이란 건국 원칙을 미국이 다시 복원해 낼 수 있을지 여부는 결국 트럼프도, 바이든도 아닌 미국 국민에게 달려 있다.

서정건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후 텍사스 오스틴대에서 미 의회와 외교 정책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미국정치연구회장으로 『미국 정치가 국제 이슈를 만날 때』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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