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그리고…] 컴퓨터 게임 중독됐다 벗어난 최유찬 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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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을 열자마자 잘못 짚었구나 싶었다. 책장 가득한 문학이론서와 고전소설. 그 앞에 시원하게 이마가 벗겨진 영락없는 서생(書生) 한 명이 눈에 들어왔다.

컴퓨터 게임에 중독됐다가 탈출에 성공했을 것 같은 괴짜교수는 없었다.

연세대 최유찬(51.국문학)교수. 그는 기자의 당혹감을 아는지 모르는지 대뜸 "무슨 게임을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어디 시험이나 해보자 싶어 내가 가장 자신있게 할 수 있는 게임인 '스타크래프트'에 대해 되물었다.

그런데 웬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그는 "'스타크래프트'는 잘 만들어진 공포게임"이라고 말했다. 이 게임이 테란.프로토스.저그 등 우주의 세 종족이 미네랄(자원)을 채취해 유닛(병력)을 키워 전투를 벌이는 전략 시뮬레이션이라는 것은 웬만한 코흘리개들도 안다. 이 게임 CD는 국내에서만 2백70만개가 팔렸다.

불쑥 불신감이 솟았다.

"이 게임의 공포는 적이 언제 쳐들어 올지 모른다는 불안에서 출발합니다. 고수(高手)들은 자신의 전력이 가장 약해지는 멀티(기지 확장) 때에 오히려 공격에 나서지요. 불안 요소를 줄이려는 허허실실 전법이라고나 할까요."

그는 빙긋 웃으며 연구실 컴퓨터 뒤켠을 가리켰다. 그곳엔 '삼국지''파이널판타지''디아블로' 등 내로라 하는 게임CD 1백여장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최교수가 게임광이 된 것은 10여년 전. 우연한 기회에 아들이 집의 286 컴퓨터에 깔아놓은 '삼국지Ⅱ'를 본 뒤 곧바로 빠져들었다.

"잠자는 것, 밥먹는 것도 잊었습니다. 자리를 펴고 누워도 게임에 나오는 중국 지도가 천장에 어른어른 하더구먼요."

왜 그렇게 게임만 했느냐고 물었더니 "잊고 싶은 일이 하도 많아서"라고 했다. 연세대 교수 임용에서 번번이 탈락하고 실업자 신세로 지내면서 마음고생이 심했다는 것이다.

"저녁 무렵 컴퓨터 앞에 앉아 다음날 정오까지 화면을 보고 있으면 머리가 멍해졌어요. 괴로운 기억들도 다 남의 일 같았구요."

이 정도면 중증이다. 담배보다 더 끊기 힘들다는 게임 중독에서 그가 어떻게 벗어났는지 궁금해졌다.

"1996년 초 교수가 되고도 한동안 게임에 미쳐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학회에서 박경리 선생의 소설 '토지'에 대한 논문을 쓰게 됐어요. 논문을 쓰려니 책을 다시 읽지 않을 수 없었죠. 원고지 3만장 분량의 책을 읽다보니 부분 부분에만 정신이 팔려 전체적인 맥이 짚어지지 않는 거예요."

그러나 평소 즐기는 '삼국지' 게임을 떠올리자 불현듯 방대한 소설이 하나의 이미지로 정리됐다고 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삼국지' 게임을 할 때는 눈을 감아도 중국을 41개주로 나눠놓은 지도가 선명하게 떠오르더군요. 각 주의 지형.인물.역사도 함께요. '토지'도 같은 방식으로 이해해 보기로 했습니다. 그랬더니 마술처럼 각각의 부분과 전체가 동시에 지도처럼 그려지더라 이겁니다."

최 교수는 요즘 인기 있는 '스타크래프트'나 '디아블로Ⅱ' 같은 게임을 떠올려보라고 했다. 이들 게임에선 전체 지도와 현재의 위치를 알 수 있는 상세한 지도가 화면에 함께 나온다. 이 두 화면을 동시에 보는 훈련을 끊임없이 하지 않고선 결코 승리할 수 없다.

그는 그해 이같은 경험을 담아 '토지를 읽는다'(솔)는 책을 펴냈다. 게임에만 빠져 있던 그는 이후 본업인 '연구'로 돌아갔다. 단순한 '게임 중독자'에서 '게임을 연구하는 국문학자'로 바뀐 것이다.

"지나치면 독(毒)이 되지만 적당한 게임은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힘을 줍니다. 시대가 요구하는 능력인 순발력.동시지각력 등을 키울 수 있거든요."

그는 강의시간에도 게임을 종종 예로 든다. 예컨대 소설과 시(詩)의 차이를 설명할 때 "복잡한 서사 구조를 가진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이 소설이라면 삶의 중요한 순간만을 포착해 모아놓은 격투기 게임은 시"라고 설명하는 식이다.

그는 최근 '컴퓨터 게임의 이해'(문화과학사)라는 책을 냈다. 2년반 동안 연구한 결과란다. 서문에서 '아버지 때문에 게임 중독에 빠진 막내아들에게 미안하다'는 구절이 눈에 띄었다.

-혼자로는 부족해 자식까지 게임 중독자로 만든 것 아닙니까.
"온라인 게임의 경우 머리로 전략을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우스를 움직이는 손놀림은 젊은이들을 따라갈 수가 없더군요. 하는 수 없이 올해 고등학교에 들어간 막내놈을 '실험용'으로 썼습니다."

-요즘 특히 온라인 게임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물질적 욕구를 자극하는 게임이 문제입니다. 게임 속에서의 능력이 갑옷.칼 같은 아이템에 따라 결정되니 게임에 빠진 청소년들이 기를 쓰고 이를 얻으려 하거든요. 아이템을 둘러싸고 절도.사기.성매매 등 각종 범죄가 발생하는 것도 이 때문이죠."

-그럼 부모들이 어떻게 하면 됩니까.
"대부분의 심각한 문제가 한 가지 게임에 몰두해서 일어납니다. 무조건 못하게 한다고 듣겠습니까. 다양한 게임에 접하게 해 객관적인 시각을 갖게 할 필요가 있어요."

그는 아이들에게 게임의 배경지식을 가르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했다. '삼국지' 게임에 빠졌다면 중국사를, 기사와 마법사가 나오는 게임이라면 서양사를 공부하도록 하는 식이다.

아이들이 익숙한 분야를 읽다보면 책읽기의 즐거움에 눈을 뜰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아들도 요즘 효과를 보고 있단다.

최교수의 이력은 특이하다. 전북 부안에서 태어난 그는 대학 4학년 때인 77년부터 3년여 동안 합동통신과 동아방송에서 기자로 일했다. 그러나 80년 광주민주화운동 현장을 취재하면서 정권에 밉보여 해직됐다고 한다.

그 뒤 서울 종로구 청진동에서 1년여 추어탕집을 운영하기도 했다. 이후 늦깎이 공부로 교수가 된 그는 "삶의 역경을 여러번 헤쳐나온 경험이 게임 중독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되더라"며 웃었다.

최교수는 컴퓨터 게임이 우리의 전통놀이와 많이 닮았다고 말했다. 농악이나 탈춤에서 굿판을 벌이는 것은 놀이패들이지만, 흥이 오르면 무대의 중앙은 관중이 차지한다. 게임도 제작자가 판을 벌여 놓지만 주인공은 사용자라는 것이다. 그는 "우리 놀이문화가 멈춰야 할 시점을 잘 아는 것처럼 게임도 자제할 줄 알아야 진정한 게이머"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그는 게임 중독의 경험에서 끈기를 얻은 것 같았다. 인터뷰가 끝난 뒤 이어진 네시간의 사진촬영 동안 "그만 하자"거나 "쉬었다 하자"는 말을 전혀 꺼내지 않았다.

사진=안성식 기자

최유찬 교수의 왈·왈·왈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이 소설이라면 격투기 게임은 시(詩)"

▶"삶의 역경을 헤쳐온 경험이 게임중독 탈출에 도움이 됐다"

▶"스타크래프트는 최고의 공포 게임"

▶"나 때문에 게임 중독된 막내아들에게 미안하다"

▶"게임에 미친 자녀에게는 게임 배경지식을 가르쳐라"

▶"멈출 줄 알아야 진정한 게이머"

약력

▶1951년 전북 부안 출생

▶78년 연세대 국문과 졸

▶77~80년 합동통신.동아방송 기자

▶80~81년 서울 종로구 청진동서

▶'무등산추어탕' 운영

▶87년 연세대 국문과 대학원 박사

▶88~89년 한겨레신문 기자

▶96년 연세대 국문과 객원교수

▶97년~현재 연세대 국문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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