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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분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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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김형석 영화평론가

김형석 영화평론가

가끔 선물처럼 찾아오는 영화가 있다. 이번 주에 개봉한 에드워드 양 감독의 ‘공포분자’(1986)가 그런 영화다. 이 영화를, 영화제가 아닌 한국의 극장가에서, 그것도 리마스터링 버전의 깨끗한 화질로 만날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1980년대 타이베이의 풍경이 고스란히 담긴 이 영화는 34년의 시차에도 여전히 날카로움을 느낄 수 있는 걸작이다.

소설가인 조우위펀(매우 코라)과 의사인 리리종(리리쥔)은 부부다. 조우위펀은 남편 몰래 옛 애인을 다시 만나고, 리리종은 승진을 위해 거짓말을 한다. 수안(왕안)은 범죄의 세계에 젖어 있는 거리의 소녀다. 샤오창(마푸쥔)은 사진 찍는 것이 취미인 청년이다.

공포분자

공포분자

흥미로운 건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연결되는 방식이다. 수안은 조우위펀의 집에 장난 전화를 걸고, 그 전화를 받고 간 곳엔 샤오창이 있다. 한편 샤오창은 길거리에서 수안의 사진을 찍은 적 있다. 그들은 서로에게 가해자이자 피해자이고, 관찰자이자 피사체이며, 우연한 만남의 대상이다. 그들은 의도 없는 관계를 맺지만, 그 결과는 거대한 파국이다.

‘공포분자’는 그러한 도시의 본질을 ‘길에 쓰러진 사람’의 이미지로 포착한다. 총에 맞는 남자들이나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수안까지, 영화엔 마치 내버려진 듯 길에 쓰러진 사람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도시의 공포란 이런 걸까? 그 섬뜩한 시선은 지금도 서늘한 울림을 준다.

김형석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