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람사전

일등 / 일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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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정철 카피라이터

정철 카피라이터

일등 : 남을 이김. 일류는 아닐 수도 있음.

일류 : 나를 이김. 일등이 아니어도 좋음.

『사람사전』은 ‘일등’과 ‘일류’를 이렇게 풀었다. 일등도 일류도 맨 꼭대기 자리, 즉 최고를 의미한다. 최고가 되는 방법은 두 가지.

하나는 한 사람 한 사람 꺾고 올라 맨 꼭대기에 서는 것. 즉 승리로 최고를 얻어내는 방법이다. 물론 이 방법으로 최고가 되는 건 쉽지 않다. 인내와 노력과 맷집 그리고 누군가 쓰러져 엉엉 울고 있어도 동정심 따위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냉정함이 받쳐줘야 한다. 우린 이런 최고를 일등이라 부른다.

사람사전 9/16

사람사전 9/16

또 하나는 나 혼자 최고가 되는 것. 즉 최고와 승리는 관계가 없음을 보여주는 방법이다. 나는 신림동에서 최고로 잘 웃는 사람이 될 수 있다. 나는 관악구에서 나 자신과의 약속을 최고로 잘 지키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우린 이런 최고를 일류라 부른다.

누군가를 밟고 올라가야 최고가 되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를 밟고 올라간 최고가 더 행복한 것도 아니다. 발바닥은 폭이 좁다. 남을 밟고 올라서면 내가 추락한다.

최근 전교 일등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린다.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그렇게 규정했기 때문이다. 기억력, 전교 일등답다. 나는 하얀 가운들의 그 과감한, 용감한, 난감한 목소리를 듣고 『사람사전』을 다시 폈다. 일등이라는 단어를 찾았다. 남을 이김. 일류는 아닐 수도 있음. 내 해석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해준 그들에게 허리 숙여 감사의 인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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