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최현철 논설위원이 간다

“병원에 갈 수 없는 환자 많은데 의대 정원에만 관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5면

최현철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지역 의사가 느끼는 지역의료의 현실

지난 3일 오후, 태풍은 이미 한반도를 떠났지만, 강원도 하늘은 아직 잿빛이었다. 간간이 뿌리는 비와 갑자기 나타나는 햇빛이 갈팡질팡하는 사이, 원주시의 한 임대아파트를 찾았다. 이 지역에서 방문 진료, 즉 왕진 활동을 하는 밝음의원 김종희 원장을 만나기 위해서다.

노노 부양·독거 장애인 가구 급증 #의료진이 찾아가는 방문진료 절실 #의대정원·수가 조정 만으론 부족 #의료전달체계 근본 수술 고민해야

병원에 갈 수 없는 사람들

지난 3일 밝음의원 김종희 원장(오른쪽)이 강원도 원주시 한 아파트를 찾아가 K씨를 진료하고, 옆에서 안의현 방문진료팀장이 채혈을 하고 있다. 최현철 기자

지난 3일 밝음의원 김종희 원장(오른쪽)이 강원도 원주시 한 아파트를 찾아가 K씨를 진료하고, 옆에서 안의현 방문진료팀장이 채혈을 하고 있다. 최현철 기자

방문 진료는 말 그대로 의사가 환자를 찾아가 진료하는 행위다. 의료법상 허용된 진료행태지만 그동안 찾아보기 어려웠다. 돈이 안 되기 때문이다. 건강보험 수가도 없어 얼마를 청구해야 할지 기준도 없었다. 2년 전 장애인 주치의 제도가 도입되고, 지난해 말 왕진 수가 시범사업을 시작하면서 이제 막 움이 트는 단계다.

밝음의원은 원주 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의료사협)이 운영하는 1차 의료기관이다. 의료진은 중요한 구성원이긴 하지만 가장 중요한 주체는 지역 조합원들이다. 이들이 모임을 유지하고 ‘건강 반장’을 정해 주변 사람들의 건강을 챙긴다. 종종 움직이지 못하는 환자의 상태가 심상치 않으면 병원에 방문 요청을 한다. 물론 조합원만 이용하는 것은 아니고 찾아오는 환자는 모두 진료한다. 4명의 소속 의사가 하루씩 돌아가며 왕진을 하고, 나머지는 병원에서 진료한다. 방문의료팀장인 안의현 간호사가 늘 동행하는 구조다. 이날은 김원장의 왕진 담당일이었다.

관련기사

주황색 왕진 가방과 채혈한 피를 담을 보랭 가방을 각각 맨 두 사람은 만나기로 약속한 아파트에 먼저 도착해 있었다. 아침부터 촉탁의 활동을 하는 요양원에서 30명 넘게 진찰을 했고, 오후에도 두 곳을 방문해 환자를 본 뒤였다.

인사를 마치고 함께 찾아간 집엔 70대 아들 K씨가 90대 노모를 모시고 살고 있었다. 방 둘에 좁은 부엌과 화장실 하나가 전부인 집이었다. 네평 남짓한 방에서 두 사람이 기거하는데 노모는 아예 움직일 수 없어 바닥에 누워만 있었다. 얼마 전부터 엉덩이에 습진이 심해져 고통스러워하던 차에 눈 밝은 요양보호사가 알아보고는 왕진요청을 한 것이다. 2004년 뇌졸중이 와 뇌병변 장애 4급인 아들 K씨는 스스로 움직이기도 힘든 몸이었다. 최근엔 발바닥 티눈이 심해져 걷기도 힘들어진 탓에 병원에 갈 엄두도 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김 원장과 안 팀장은 우선 할머니 상처 부위를 소독하고 약을 발랐다. 기저귀 자주 가는 게 중요하다며 요양보호사와 K씨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다음은 K씨 차례. 발바닥 티눈 부위를 세심히 살폈다. 연신 신음을 하던 K씨는 약을 바르는 김 원장에게 “정말 티눈 나을 수 있어요?”하고 물었다. 그렇다는 대답에 “진즉에 알았으면 좋았을걸” 하며 아쉬워했다.

혈압을 재고 채혈을 하며 K씨 몸 상태를 묻자 여기저기 아픈 곳이 계속 나왔다. 엉치뼈 근처 근육은 파열됐고, 전립선 장애로 소변에 문제가 있었다. 잠을 잘 못 자 수면제를 복용해야 했다. 김 원장은 간단한 약 처방을 하려 했지만, 누군가 병원에 와야 했다. 법상 처방전은 병원에서만 발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맘씨 좋은 요양보호사가 오기로 하고 진료를 마쳤다. 어느새 45분이 훌쩍 지나 있었다.

K씨 집을 나선 김 원장은 “방문 진료 신청자 대부분이 노노부양 가족”이라고 설명했다. 모자든 부부든 70~80대가 기본이고 100세를 바라보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상당수는 요양보호사의 도움을 받는데 병원과 보호사의 연계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다음 방문지는 80대 H씨 부부가 사는 집이었다. 부인이 의식은 있었지만, 거동을 할 수 없어 침대에 누워 있었다. 다행히 H씨는 큰 병이 없어 부인을 살뜰히 수발하고 집 정리도 말끔하게 하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부인 등에 욕창이 생겼다. 가려움을 참지 못하고 긁어 피투성이가 되자 남편이 수소문해서 장갑을 구해 끼웠다. 병원에서 사용하는 좋은 품질의 장갑이었지만 공기가 통하지 않는 소재라는 게 문제였다. 이번엔 손에 습진이 심해졌다. 보다 못한 H씨가 고름을 짜내려고 바늘로 찔렀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감염이 된 듯했다. 김원장이 도착해 붕대를 벗겨보니 양손 모두 시꺼멓게 변색해 있었다. 서둘러 소독을 하고 약을 바른 뒤 공기가 통하는 재질의 반창고를 붙였다. 김 원장은 “큰 병은 아니지만, 그냥 뒀으면 손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을 것”이라며 “병원에 갈 수는 없고 마음은 급하다 보니 오히려 병을 악화시키는 일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마침 침대 발치에 놓인 TV에선 의대 정원 확대와 공공의대 신설을 둘러싼 전문가들의 토론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지역 의료의 실상

유형별 병원과 소속 의사 수

유형별 병원과 소속 의사 수

이날 방문 진료 일정은 H씨 집을 끝으로 마무리됐다. 도심에 있는 밝음의원으로 자리를 옮겨 지역의료와 최근 의사 파업 등에 관한 얘기를 좀 더 들었다.

진료실에서 환자를 맞으면 환자가 호소하는 증상에 초점을 맞춰 검사와 진단, 처방이 이뤄진다. 하지만 그 환자가 사는 공간에 들어서면 왜 병이 생기고, 그 환자가 감당할 수 있는 처방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된다고 김 원장은 설명했다. 그는 “환자들이 처음엔 가장 아픈 곳만 얘기하다가 나올 때쯤 되면 감춰둔 증상을 털어놓는다”고 했다. 나중에 나오는 증상이 더 심각한 병인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래서 오가는 시간을 빼더라도 30분 이상 진료를 할 수밖에 없게 된다.

현재 대부분의 진료는 환자가 의료기관을 찾아가면서 시작된다. 그런데 고령이나 장애로 이동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면 응급 상황이 아닌 이상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진료받기를 포기한다. 이날 김 원장이 들렀던 30대 남성 환자의 경우 건선과 관절염을 심하게 앓아 누워만 있다고 했다. 조손가정에서 자랐지만 얼마 전 돌봐주시던 할머님이 요양원에 들어간 뒤 혼자서 사는 이 환자는 병원에 갈 방법이 없다고 한다.

지역에선 이런 문제가 증폭된다. 고령화 현상 때문이다. 원주만 해도 65세 이상 노인 비율이 19%이고, 인근 횡성·영월 같은 강원도 지자체들은 25~30%에 이른다. 지역 의료 수요의 상당수는 여기서 발생한다. 김 원장은 “지역 의료기관 전체가 이 영역을 다룰 수는 없지만, 공공의료의 한 부분은 예방의료로서 방문 진료를 담당해야 하고, 앞으로 그 수요는 더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지역의사제를 둘러싼 파업사태에 대해 김 원장은 말을 아꼈다. 다만 “현장의 공감은 없는 편”이라고 진단했다. 논란과 갈등의 과정에 지역의 현실에 대한 고민이 별로 없다는 생각을 에둘러 말한 셈이다. 실제 밝음의원은 1, 2차 파업에 동조하지 않았고, 의료사협 연합회 소속 조합 중 한 곳은 공식적으로 반대 성명을 내기도 했다.

곪아있는 1차 의료기관 수술해야

의료계 내부에도 의대 정원을 둘러싼 이번 갈등에 대해 정부나 의사들 모두 핵심을 짚지 못하고 있다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상당히 있다. 지역 간 의료 편차가 의사 면허자를 늘리거나, 지역의 의료 수가를 조금 올려주는 단편적 처방으로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보다는 속으로 곪아있는 의료전달체계 개편을 시작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의대 정원을 늘려도 어차피 5~10년 뒤에나 지역 의사로 활동하게 되는 만큼 이참에 근본적인 수술에 나서는 것도 생각해 볼 만하다는 것이다.

지역 응급센터와 공공의료원이 굳건히 서는 것과 함께 1차 의료기관 수술도 중요한 주제 중 하나다. 의료기관에 소속돼 활동하는 의사 10만 2400여 명(2018년 기준) 중 1차 의료기관인 의원에서 일하는 수가 4만1000여명이다. 특정 진료과목에 집중하는 곳도 있지만 절반가량은 일반 진료를 담당하고 있다. 의대와 전공의 과정 11년 동안 3차 의료기관에서 수련한 뒤 전문의로 개원하면 무척 낯선 환경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반면 환자들은 진료의뢰서 한장만 있으면 수도권 상급종합병원에 얼마든지 갈 수 있다. 일차 보건의료 학회 회장을 맡고 있는 인하대 의대 임종한 교수는 “시스템이 갖춰진 3차 의료기관과 직접 경쟁하는 구조에선 개원의들이 살아남기 어렵다”며 “개원의 넷 중 하나가 전공을 포기하고 비만과 성형 진료에 나서는 이유”라고 말했다. 1차 의료기관에서 주치의 역할을 하고 문제가 생기면 2차, 3차로 보낼 수 있는 체계가 제대로 갖춰지려면 의대 교육과정부터 개편할 필요가 있다고 임 교수는 지적했다.

최현철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