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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최준호의 사이언스&

‘연구하면 피 본다’…과학자들이 기피하는 언던 사이언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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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최준호 기자 중앙일보 과학ㆍ미래 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최준호 과학&미래 전문기자

최준호 과학&미래 전문기자

“사무실 방역한다고 살균제를 주기적으로 뿌리고부터 잔기침이 나는데 신경 쓰이네요.” “가습기 살균제로 홍역 치르고 또 이런 짓을 대대적으로 벌이는구나.” “바이러스를 소독하랬더니 인간이 박멸될 판이다.”….

가습기살균제·메탄올 워셔액… #무시되고 연구 안 된 과학 영역 #생활용품 곳곳에 언던 사이언스 #정부서 연구 발굴하고 지원해야

지난달 24일 경희대 동서의학연구소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이후 사용이 늘어난 살균·소독제에 호흡기가 노출되면 폐 질환에 걸릴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코로나19 살균·소독제에 들어있는 일부 물질이 ‘가습기 살균제 사건’으로 논란이 된 염화디데실디메틸암모늄(DDAC)과 비슷한 작용 기전을 가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호흡기 노출에 주의해야 한다는 설명이었다.

코로나19 확진자가 급증하고 있는 중이라 신문·방송에서는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한 뉴스였다. 하지만 인터넷에서는 독자들의 관심이 뜨거웠다. 뉴스 아래 달린 댓글에는 일상생활 곳곳에서 살균 소독제를 분무기로 뿌려대고 있는 현실을 고발하는 내용이 가득했다. 1500명에 가까운 목숨을 앗아간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부나 국민 모두 ‘살균제’가 균이나 바이러스뿐 아니라 사람에게도 위험하다는 인식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사이언스&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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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런 일이 자꾸 일어날까. 답은 경희대 동서의학연구소의 보도자료에 있었다. 자료는 “(DDAC는) 그동안 호흡기 노출과 관련된 연구결과가 거의 전무한 성분”이라고 밝히고 있다. DDAC만의 얘기가 아니다. 가습기 살균제가 그랬고, 2018년 2월에야  제조·판매·사용이 금지된 차량용 메탄올 워셔액도 같은 얘기다. 살균·살충제가 ‘균’과 ‘벌레’만 죽이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화장실이나 주방 소독에 흔히 쓰는 락스, 여름철 방안에서 쓰는 모기향도 어떻게 써야 사람에게 안전한지를 고민해 봐야 할 일이다. 생활용품 속 독성(毒性) 문제가 적어도 한국 사회에서 소위 ‘언던 사이언스’(Undone Science), 즉 ‘연구되지 않고 외면당한 과학’의 대표적 영역이라는 얘기다.

미국의 과학기술학자이자 과학운동가인 데이비드 헤스(64) 밴더빌트대 교수는 그의 책 『언던 사이언스』(2016) 에서 “체계적으로 무시되고 연구되지 않는 과학 연구 영역을 언던 사이언스”라고 정의했다. ‘체계적 무시’라는 말은 정부의 연구개발(R&D) 예산 배분 선정 과정이나, 과학자들의 연구 선택 등 과학 연구 체계 내에서 중요하지 않은 주제로 여겨져 소외된다는 것을 뜻한다. 결국은 기업의 이해나, 이에 영향을 받은 학자와 정부가 민감할 수 있는 주제는 연구하기를 꺼리면서 ‘연구되지 않고 외면당한 과학’의 영역이 생겨나게 된다.

언던 사이언스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유전자변형농산물(GMO)의 유해성 여부, 생활 속 저선량 방사선의 위험 등도 체계적인 연구가 부족한 분야다. 프랑스 정부는 지난해 도넛 위에 눈이 내린 것처럼 뿌려진 장식용 흰색 가루의 사용을 금지했다. 이 가루의 정체는 ‘이산화티타늄’으로, 그간 무색·무취·무독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최근 프랑스 과학자들 사이에서는 이산화티타늄을 섭취했을 경우 암 유발 가능성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한국에서도 안전성평가연구소 등 정부 산하기관에서 이 문제에 대해 고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규모

가습기 살균제 피해규모

『언던 사이언스』를 번역한 김동광 박사는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던 가습기 살균제 사태도 정작 필요한 연구가 이뤄지지 않은 대표적 사례”라며 “문제의 제품이 출시된 1994년부터 피해가 밝혀진 2011년까지 연간 60만 개가 판매됐지만 인체 유해성에 대한 조사는 지극히 형식적인 수준에 그쳤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처럼 중요한 문제에 연구가 제대로 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체계적인 지식의 비(非) 생산에 따른 구조적 결과이며 의도되고 강요된 무지”라고 덧붙였다.

사실 언던 사이언스보다 더 큰 문제는 ‘용병이 된 과학자’들이다. 기업의 이익을 위해 진실을 호도하는 연구결과를 만들어내는 인물들이다. 미국의 과학사학자인 나오미 오레스케스 캘리포니아대 샌디에이고캠퍼스 교수는 그의 책 『의혹을 팝니다』(2012)에서 흡연과 암 발병 사이의 연관성이 아직 입증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과학자들, 지구 온난화의 현실을 부정하는 과학자들 중 상당수가 기업의 의뢰를 받은 ‘용병 과학자’라고 주장한다.

국내에서도 유사한 사례가 있다. 2017년 대법원은 가습기 살균제 사건과 관련해 배임수재 등의 혐의로 기소된 국내 한 사립대 A교수에 징역 1년4개월에 추징금 2400만원을 선고한 원심판결을 확정한 바 있다. A교수는 ‘가습기 살균제 노출평가 시험 및 흡입독성 시험’ 연구 용역을 진행했고, 2011~2012년 옥시에 유리한 결과를 내달라는 청탁과 함께 2400만원을 받은 혐의로 기소됐다.

현재환 부산대 교양교육원 교수(과학기술학)는 “논쟁의 대상이 되는 과학적 문제들은 과학공동체 내에서도 논란 중인 경우가 많다”면서 “우리가 일차적으로 물어야 할 것은 과학적 진실 여부가 아니라, 그 진실에 다가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의도적인 개입이나 배제가 사회적·도덕적으로 온당한가에 있다”고 말했다. 현 교수는 “언던 사이언스나 용병 과학자의 폐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정부나 공공분야에서 이런 분야에 대한 연구를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지원하는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키워드

언던 사이언스(Undone Science)
무시되고 연구되지 않는 과학 연구 영역을 뜻하는 표현. 미국의 과학기술학자이자 과학운동가인 데이비드 헤스 밴더빌트대 교수가 정의했다.

용병 과학자
기업의 이익을 위해 특정 분야를 왜곡되게 연구하는 과학자를 뜻하는 표현. 나오미 오레스케스의 책 『의혹을 팝니다』에서 이 단어를 사용했다.

최준호 과학&미래 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