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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김일성 맞서 혼란한 때...南 민주국가 만든 공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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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현대사를 이해하는 다른 관점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

지난 8·15 행사에서 광복회 회장은 “분단에 기생해 존재하는” 친일파 청산을 국민의 명령으로 규정하며, 이승만 대통령을 “친일파와 결탁”해 통치한 장본인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비판은 역사 해석의 정치화를 통해 개혁 정책을 주도하는 현 정부의 적폐청산, 반일역사청산 운동의 진면목을 다시 한 번 보여준 것이다.

[최장집 특별기고] #이승만 분단·친일 책임 지우는 건 #현대사 이념적으로 단순화한 해석 #김일성 맞서 혼란·긴박한 시기에 #남한을 민주국가로 건설한 공로

이승만 대통령에게 분단의 책임을 묻고, 그 중심에 친일파와의 동맹이 자리 잡고 있다는 공격에 대해 역사의 맥락에서 평가해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광복회 회장은 복잡다단하고 다층적인 힘들로 구성된 역사 문제를 단순한 이념과 도덕의 잣대로 선별하고 단순화한다. 역사청산을 주도하는 개혁자들 또한 전후 냉전을 통한 세계질서 재편, 냉전의 국내화, 분단국가 건설과 한국전쟁을 포함하는 현대 한국사를 지극히 이념적이고 자폐적이라 할 만큼 협애한 관점으로 이해하는 것 같다. 이 문제에 대해 칼 마르크스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인간은 스스로 자기 역사를 만들어나가지만,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자신이 선택한 환경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주어지고 전수받은, 이미 존재하는 환경 하에서 역사를 만든다.”

분단 감수하고 남한 지켜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1948년 7월24일 중앙청에서 한복을 입고 취임사를 읽고 있다. [중앙포토]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1948년 7월24일 중앙청에서 한복을 입고 취임사를 읽고 있다. [중앙포토]

이승만 대통령 비판은 다음과 같은 전제를 깔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해방 후 정치 공간에서 그가 친미반공주의에 집착하지 않고 한반도에 들이닥친 냉전에 투철한 민족의식으로 대응했다면 분단을 막고 통일을 이뤄낼 수도 있었다. 이 가정에 대해 세 가지 질문을 던져볼 수 있겠다.

첫째, 분단을 피하는 것 자체가 가능했을까? 둘째, 설령 남한에서 여러 정파로 나뉜 정치세력들이 분단을 막는데 합의했다 하더라도, 분단 이전 북한의 김일성 체제와 통일에 접근할 수 있는 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었을까? 마지막으로 북한이 김일성 주도 하에 스탈린식 사회주의체제를 공고화하는 시점에서 남북한 지도자들이 통일에 합의해 남북한을 아우르는 통합 정부를 수립하고 이를 유지해나갈 수 있었을까? 이 질문 모두에 대해 나의 답은 부정적이다. 가장 큰 이유는 미소 간 냉전이 빠르고 강력하게 전개된 데서 찾을 수 있다. 1947년 3월의 트루먼 독트린 선언과 그에 따른 제2차 미소공위 결렬은 분단국가 건설을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김일성 통치 하에서라도 통일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괜찮은 것일까? 이승만은 이 질문에 대해 분명한 답을 갖고 있었다. 분단을 감수하더라도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에 기초한 남한 국가를 먼저 수립하고, 이를 기초로 통일을 모색하겠다는 것이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미국과의 동맹이 절대적이다. 그의 신념과 결단이 옳았음은 무력을 통해 분단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던 김일성의 전쟁 도발로 반증되었다.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근거는 남한 국민의 절대 다수가 한국 정부를 지지하며 북한의 남침에 대항해 싸우기를 선택한 데 있다.

민주국가 건설위해 친일파 흡수

냉전 초기 남한의 분단국가 건설 과정에서 군, 경찰, 행정관료, 사법기구 등 국가의 중심적 제도가 친일파로 채워졌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없는 사실이다. 1948년 8월과 9월 거의 동시에 남북한 각각에서 수립된 분단국가는 서로를 인정하며 통일을 모색할 수 있는 그런 성격을 가질 수 없었다. 북한의 김일성은 스탈린체제를 모델로 국가 건설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중국 공산당이 내전에 승리한데 고무되어 전쟁 준비를 가속화하며 스탈린을 설득해 결국 남침을 감행했다.

남한의 상황은 그와 정반대였다. 이승만 정부가 수립됐다고는 하나, 해방 후 혼란으로 인해 실제로는 많은 한계를 안고 있었다. 최소한 이념과 원리에서만큼은 자유주의적 입헌주의에 입각한 민주주의를 통해 정부가 운영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북한과의 경쟁은 사활을 건 것이었고, 민주주의에 대한 역사적, 문화적 경험과 전통은 부재했다. 내전에 가까운 좌우 갈등과 극도의 혼란 상황에서 민주주의를 운용하며 북한의 스탈린체제와 경쟁한다는 것은 애당초 그 결과가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런 조건에서 이승만 정부는 북한체제에 상응할만한 신생 국가의 제도 건설을 어떻게 이뤄냈나? 그보다 더 긴박한 문제로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하는 북한체제의 군사화에 대응해 어떻게 남한의 군을 건설할 수 있었나? 그 해답은 이른바 ‘친일파’를 국가기구로 폭넓게 흡수한 것으로 나타났다. 즉 일제하 식민통치기구에서 습득한 경험과 전문성의 동원이 이승만의 선택이었다. 1~2년을 다투는 지극히 짧은 기간 동안 이 지난한 과업을 ‘친일파’의 조력 없이 수행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승만은 친일파 청산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밀쳐두고라도 나아가 ‘친일파’를 동원해서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과업의 수행을 마다하지 않았다.

당시 이승만의 결정은 마키아벨리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정치적 지도자가 ‘긴급 상황’, 즉 네체시타(necessità)에 부응하여 결단적 행위를 밀고 나아가는 비르투(virtù)의 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승만은 당시 정치인들 가운데 냉전의 전개 과정과 그것이 한국에 미칠 분단이라는 결과의 불가피성을 누구보다 냉철하게 파악하고 있었으며, 그것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성공적으로 실현시켰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결국 냉전의 전개로 나뉜 자유민주주의 질서내로 남한 사회를 편입시키는 진보적 결과를 가져왔다고 평가할 수 있다.

많은 사람 희생, 독재한 건 잘못

물론 이승만 대통령의 역사적 공과를 평가할 때, 그에 대해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다. 현실이 비록 냉전반공주의의 다른 이름인 ‘냉전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조건이라 하더라도,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라는 이상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자유의 공간은 엷게나마 열릴 수 있었다. 또한 해방 후 분단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다. 무고한 사람들이 친북으로 몰려 죽은 경우도 많다. 게다가 전후 분단국가가 안정을 찾아갈 때 그는 민주주의의 제도와 규범으로부터 더욱 벗어나 점점 더 독재 정치의 길로 나아갔고 급기야 4·19 학생혁명을 불러왔다.

이승만은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를 몸소 실천하고 그 스스로가 민주주의의 건설자가 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결점에도 불구하고 그가 전후 한국 국가 건설의 지도자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는 한국을 세계적 차원에서의 자유주의 체제에 편입시키고, 신생 국가의 목표와 존재 이유로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를 추구할 수 있도록 했다. 이점에서 뒷날 민주화의 초석을 놓았다고 말할 수 있다.

역사에 대한 선악 구분, 평화공존 도움안돼

광복회 회장의 이승만 비판은 민중주의적 민족주의를 이루는 가치와 정조의 발현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주장에 대해 비판적으로 말하는 이유는, 문재인 정부의 중심 정책이 냉전 시기와 같은 통일이 아니라 북한과의 화해협력, 평화공존이라면 그 목표를 위해서도 그러한 역사 인식은 결코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반일주의를 바탕으로 한 근본주의적 민족주의는 기본적으로 과거지향적이고, 쇼비니즘적이며, 무엇보다도 개방적이지 않다. 그것은 이승만, 박정희로 이어지는 세계를 향한 지향, 개방성, 진취성과 정반대 방향에 있는 것이다. 이승만의 미국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를 향한 개방성과 외교술, 그리고 박정희의 세계 시장을 향한 경제발전 전략은 세계를 향해, 세계를 무대로 행위 공간을 확장한 큰 전환이었고, 그것은 분명 진보적인 것이었다.

두루 알다시피 한국의 민족주의는 반일주의를 본질로 한다. 따라서 현재 진행 중인 역사청산 운동은 일제잔재청산과 동의어이다. 하지만 현 정부는 그 청산 대상에 포함된 한일관계가 남북한 평화공존을 추구하는데 얼마나 중요한지는 고려하지 않는 듯하다. 미소 냉전을 대신하는 미중 경쟁관계가 부상하는 조건에서 한일관계를 제대로 이해하고 활용하지 못하면, 한국이 국제정치에서 중요한 플레이어로 행위할 수 있는 범위와 능력에서 큰 제약을 받게 된다.

지난 역사를 두고 민족의 가치를 기준으로 선악을 가르는 인식과 태도는 민주주의를 위해서도 평화공존을 위해서도 밝은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