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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넬 밀러 『디어 마이 네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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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양성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디어 마이 네임

디어 마이 네임

나는 돈만 있으면 감방문이 활짝 열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나는 폭력이 발생했을 때 여자가 술에 취한 상태였으면 이 여자를 진지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몰랐다. 나는 폭력이 일어났을 때 남자가 술에 취한 상태였으면 사람들이 그 남자를 동정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나는 내 끊긴 기억이 그에게 기회가 되리라는 사실을 몰랐다. 나는 피해자가 된다는 건 신뢰받지 못한다는 것과 동의어라는 사실을 몰랐다.

샤넬 밀러 『디어 마이 네임』

‘내가 아는데 그 남자는 그럴 사람이 아니다’ ‘여자의 처신에 문제가 있었다. 뭔가 딴 뜻이 있는 것 같다.’ 피해 여성은 종종 가해자보다 더 가혹한 여론의 심판 과정을 거친다. ‘피해자다움’이 발목을 잡는다. 가해 남성은 ‘여자도 즐기는 줄 알았다’고 진술한다. 어느 순간 남자는 "모든 것을 잃게 된” 안타까운 존재가, 여자는 그저 "이런 일을 겪게 된 하찮은” 존재가 돼버린다.

어디선가 많이 보고 들은 얘기 아닌가. 2015년 미국의 성폭행 사건 피해자 샤넬 밀러도 예외는 아니었다. 밀러가 재판에서 낭독한 ‘피해자 의견 진술서’가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기 전까지, 법과 여론은 스탠퍼드대 장학생이자 전도유망한 수영선수인 가해자 편이었다. 마침내 캘리포니아 주 법이 바뀌고, 감경 결정을 한 담당 판사는 파면됐다. 책은 그 기록이다. 성폭력 범죄에 대해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를 보호하는 쪽으로 기울어진 문화와 사법 시스템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피해를 극복해가는 ‘생존자’의 일기로도 의미 있다.

양성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