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 한재동의 남자도 쇼핑을 좋아해(19)
우리 집이 유별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방마다 시계가 있다. 심지어 화장실에도 있어서 집안 어딜 가든지 시계를 볼 수 있다. 모양과 구매 시기, 디지털과 아날로그, 각각의 특성과 스토리가 있다. 그리고 한번 사면 정말 오래 쓴다. 기술의 발달로 고장이 안 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렇게나 구매 주기가 길다면 시계 제조회사가 걱정될 정도다.
스마트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고, 스마트워치가 내 수면상태까지 관리해주는 세상이다. 하지만 내가 우리 집 시계들에 바라는 것은 묵묵히 시간을 알려주는 것일 뿐이다. 방마다 시간이 달라서 그렇지 나름 제 역할을 잘 해내고 있다.
그중 가장 오래된 시계는 안방 침대 옆에 있는 무선충전 가능한 LED 우드 시계다. 결혼 전 무선충전이 가능한 스마트폰을 살 때 같이 구매한 제품으로, 당시에는 꽤 인기가 있는 인테리어 소품이었다. 직사각형 나무토막 같은 모양에 LED로 시계와 날짜, 온도를 알려준다. 충전속도는 느리지만 잘 때 스마트폰을 올려두면 출근 즈음에는 완충이 된다.
은은한 주황빛으로 시간을 표시하기 때문에 새벽에 잠에서 깨도 스마트폰의 밝은 액정에 눈이 부시지 않고도 시간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알람 기능이 불안정해 나에게 몇 번 지각을 하게 만들기도 했다. 스마트폰을 무선충전 위치에 제대로 못 올려놔서 방전이 돼버렸고, 시계 알람마저 제대로 울리지 않아서 숙면을 취하고 말았다. 개운하게 일어나 시간을 확인했을 때의 기분을 생각하면 아직도 온몸의 털이 서는 것 같다.
우리집 시계 연공서열 2위는 거실에 있는 LED 시계다. 일명 국민 시계라고 불린다. 결혼할 때 백화점 웨딩 멤버십에 가입해서 사은품으로 받았다. 신혼집 집들이에 놀러 가면 항상 있는 것을 보니, 국민시계라는 명성을 가질 만하다. 대부분 결혼할 때 참여한 이벤트에서 받은 것이라고 한다.
사은품으로 받은 제품이라 크게 기대하지 않았지만, 고장도 안 나고 활용성도 높다. 밤에 불을 꺼도 스탠드 등을 켜놓은 것처럼 밝다. 사실 이건 장점이자 단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시간을 또렷하게 확인할 수 있지만 불을 끄고 TV를 볼 때는 방해가 된다. 밝기를 조절할 수는 있지만 가장 어둡게 설정해도 매우 밝은 편이다.
빛 공해라는 건 이럴 때 쓰는 말인가. 또 하나 아쉬운 점은 USB로 전원을 연결해야 하는데, 깔끔한 선처리가 어렵다. 오죽하면 맘카페에서 이 시계의 선처리 예쁘게 하는 방법을 따로 정리한 글이 있을 정도다. 차라리 교체주기가 짧아지더라도 건전지로 전원공급을 하는 게 어땠을까 한다. 그러면 나처럼 정리 잘 못 하는 사람도 예쁘게 사용할 수 있지 않았을까?
우리 집 화장실을 지키고 있는 시계는 실리콘 방수시계다. 1초가 소중한 아침 출근준비를 위해 구매했다. 나의 아침은 침대 옆 시계를 보며 시작되는데, ‘5분만 더’를 외치며 뭉그적대다가 시계가 최후의 마지노선을 가리키면 간신히 일어난다. 졸린 눈을 비비며 샤워를 하러 들어가면 따뜻한 물로 샤워하다가 긴장이 풀려 허둥지둥 대기 일쑤다.
이럴 때 샤워기 옆에 붙어있는 실리콘 방수시계가 지각을 막아준다. 샤워할 때 볼 수 있는 시계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인터넷을 검색하다 득템했다. 가격도 만 원 이하로 비싸지 않았고, 디자인과 색상도 다양해서 취향에 맞춰서 구매할 수 있다. 습기가 많은 화장실이라 금방 고장 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3년 가까이 고장 없이 잘 쓰고 있다.
부모님 댁에는 나무로 된 외관에 로마자로 숫자가 표기된 벽시계가 있다. 얼마 전에 고장이 났는지 멈춰버렸다. 마침 집안을 수리하던 터라 대청소 겸 짐 정리를 하고 있었는데, 고장이 나서 버리라는 것을 내가 말렸다. 요즘 레트로 유행에 딱 맞는 느낌이라 고쳐서 쓰기로 했다.
알고 보니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부모님 결혼 혼수로 구매한 시계라고 한다. 2대째 물려받은 시계를 집안에 두고 있다고 생각하니, 뭔가 영화 같아서 SNS에 허세를 부리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무엇보다도 우리 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 내가 아니어서 기쁘다.
직장인 theore_creator@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