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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여름 단상-Ⅱ

중앙일보

입력

어제는 외래를 보다가 요즘은 잘 안보게 되는 환자를 한명 보았다.

그가 처음에 응급실에 왔을 때만 해도 나는 이곳 병원서 근무하기 시작한지 얼마안된 풋내기 이비인후과 전문의였고 그런 만큼 모든 환자들에 지나치리만큼 의욕적으로 대할 때였다.

그는 제주도에서 왔다고 했으며 이미 목의 하단부에 기관절개술을 하고 금속 기관튜브를 끼고 있었고 머리는 거의 반백이었고 말소리도 분명치 않았다.

그뿐 아니라 가지고 온 소견서에 의하면 교통사고로 뇌를 다친후의 후유증으로 정신장애도 동반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의 상태가 그런 만큼 보호자가 반드시 필요했는데 의외로 그 보호자는 나이든 할아버지였다.

대개 이런 경우 보호자는 부인이나 어머니가 대부분이었는데 매우 의외였다. 그 할아버지는 그의 아버지였다. 할아버지는 보호자를 찾는 나에게 와서 매우 간곡하게 입원을 부탁하였다. 이미 그의 상태는 입원이 필요한 상태였기에 입원을 하게 되었다.

결국 내가 성대마비의 치료를 위해 수술을 시행하였고 기관튜브를 제거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다른 재활 프로그램과 기관지 청소 등이 필요하였으며 따라서 24시간 보호자의 손이 필요한 상태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입원 일주일이 지나도 보호자는 그 할아버지 한 분이었으며 그의 부인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아들을 너무도 극진히 보살피셨다. 하루는 내가 가래를 빼는 방법에 대해 직접 시범을 보이고 있었다. 할아버지께 가르쳐드리기 위한 것이었는데 내 시범을 본 할아버지는 곧 직접 아들의 기관이에서 가래를 뽑아보게 되었다. 하지만 갑작스런 기침으로 가래가 할아버지의 얼굴에 온통 범벅이 되었다. 그때의 그 아버지의 너무도 차분한 반응이 나의 뇌리를 강하게 때렸다.


환자는 약 3개월간의 입원치료를 받고 퇴원하였다. 하지만 그 아버지의 얼굴은 아직도 생생하다. 많은 환자들을 보게 되는 직업이어서 매우 다양한 인간상을 겪게 되는 직업이지만 그때의 그 아버지를 아직 잊을 수가 없으며 그가 오늘도 제주의 맑은 공기를 그의 아버지와 함께 마음껏 마시고 있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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