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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주독미군 1만2000명 감축…트럼프·에스퍼 변명 달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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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9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기자들과 만나 독일이 방위비를 내지 않아 주독 미군 감축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로이터=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9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기자들과 만나 독일이 방위비를 내지 않아 주독 미군 감축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로이터=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주독 미군을 1만2000명 가까이 감축하는 방안을 29일(현지시간) 공식 발표했다. 마크 에스퍼 국방장관은 장기적인 전략에서 미군을 재배치하는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독일이 방위비를 충분히 내지 않아 내린 조치라고 강조했다.

미 국방부 주독 미군 감축안 공식 발표 #트럼프 "독일 채무불이행…돈 내면 재검토" #독일보다 덜 내는 벨기에·이탈리아로 이전 #에스퍼 "세계 미군 재배치 검토 장기 전략"

에스퍼 장관은 이날 브리핑을 통해 독일에 주둔하는 미군 병력 3만6000명 가운데 1만2000명을 빼겠다고 발표했다. 철수 병력 가운데 약 6400명은 본국으로 귀환시키고 5600명은 유럽 내 다른 국가로 이동시키기로 했다.

미국으로 돌아오는 병력은 전 세계 순환배치에 투입될 예정이다. 러시아와 인접한 흑해 및 발트해 지역과 폴란드 등 동유럽 배치가 거론된다. 유럽에 남는 병력은 다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인 벨기에와 이탈리아로 이동할 예정이다. 독일에는 미군 약 2만4000명이 남는다. 현재 2만8500명 규모인 주한미군보다 적은 규모다.

에스퍼 장관 발표 직후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기자들과 만나 “(독일이) 돈을 안 내기 때문에 병력을 줄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독일이) 청구서를 지불하기 시작하면 (감축 계획을) 재고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방위비 증액과 철군 문제를 연계시킨 것이다.

이를 두고 한국에도 방위비 분담금을 대폭 증액하라고 압박하면서 주한미군 감축 카드를 꺼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관측이 나온다. 한·미 방위비 분담금 협상은 13억 달러(전년 대비 50% 인상)로 증액하라는 미국 요구와 첫해 13% 인상까지 가능하다는 한국 입장이 절충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간 트럼프 행정부는 독일이 국내총생산(GDP)의 2%를 국방비로 쓰겠다고 약속했으나 이를 이행하지 않았다고 비판해왔다. 2014년 나토 회원국은 2024년까지 각자 방위비를 GDP의 2%로 늘리기로 합의했지만, 독일을 비롯한 여러 나라가 기준에 못 미치고 있다. 독일은 지난해 기준으로 1.36%에 머물렀다.

트럼프 대통령은 “독일은 체납자(delinquent)”라고 규정했다. 미군은 독일을 보호하기 위해 주둔하는데 독일은 마땅히 지불해야 할 돈을 내지 않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더이상 호구(suckers)가 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마크 에스퍼 미국 국방장관은 29일(현지시간) 주독 미군 약 1만2000명을 감축하겠다고 발표했다. 6400명은 본국으로 귀환시키고, 5600명은 벨기에와 이탈리아 등지로 옮기겠다고 밝혔다. 사진은 지난 3월 에스퍼 장관의 기자회견 장면. [AFP=연합뉴스]

마크 에스퍼 미국 국방장관은 29일(현지시간) 주독 미군 약 1만2000명을 감축하겠다고 발표했다. 6400명은 본국으로 귀환시키고, 5600명은 벨기에와 이탈리아 등지로 옮기겠다고 밝혔다. 사진은 지난 3월 에스퍼 장관의 기자회견 장면. [AFP=연합뉴스]

앞서 에스퍼 장관도 브리핑에서 “독일은 유럽에서 가장 부자 나라”라면서 “국방비를 더 쓸 수 있고 더 써야 한다. 2% 기준을 맞춰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에스퍼 장관은 미군 감축이 방위비 불만에 따른 보복적 성격보다는 미국의 세계 안보전략 변화에 따라 미군 재배치를 검토하는 차원이라는 점을 강조했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 지시로 주독 미군 감축 결정이 속도를 낸 측면은 있지만, 단지 방위비를 제대로 내지 않는 데 대해 벌주는 차원은 아니라는 것이다.

에스퍼 장관은 브리핑에서 “유럽 주둔 미군 숫자를 줄이겠다는 대통령의 계획을 달성하면서 동시에 미군의 장기적 전략과 관련한 다른 목표도 충족시킨다”고 말했다.

이번 감축안은 트럼프 대통령이 주독 미군 감축을 지시했다는 월스트리트저널(WSJ) 보도가 지난달 5일 나온 뒤 두 달이 안 돼 발표됐다. 11월 대선을 앞두고 성과가 필요한 트럼프 대통령이 주독 미군 철수 발표를 서둘렀을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은 2016년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를 대선 공약으로 제시하면서 전 세계에 파병된 미군을 집으로 데려오겠다(Bring Our Boys Home)고 선언한 바 있다.

에스퍼 장관은 몇 주 안에 철군 조치가 시작될 것이라고 말했다. 재배치는 앞으로 수개월, 길게는 수년 동안 진행될 예정이며 수십억 달러 예산이 소요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29일(현지시간) 독일 슈트트가르트에 있는 미군 유럽사령부(EUCOM) 본부 전경. 미 국방부는 이날 주독 미군 3만4500명 가운데 1만2000명을 감축하겠다고 발표했다. 유럽사령부는 벨기에로 옮길 예정이다. [AFP=연합뉴스]

29일(현지시간) 독일 슈트트가르트에 있는 미군 유럽사령부(EUCOM) 본부 전경. 미 국방부는 이날 주독 미군 3만4500명 가운데 1만2000명을 감축하겠다고 발표했다. 유럽사령부는 벨기에로 옮길 예정이다. [AFP=연합뉴스]

다른 유럽 국가로 이동하는 병력 5600명 가운데 F-16 전투비행단은 이탈리아로 이동할 예정이다. 독일 슈투트가르트에 있는 유럽사령부(EUCOM)는 벨기에 몬스로 이전한다. 역시 독일에 있는 아프리카사령부도 옮길 예정이다.

하지만 유럽사령부가 옮겨가는 벨기에는 국방비 지출이 GDP의 1%에 못 미치고, 이탈리아는 1.2%를 지출하고 있다. 두 나라 모두 독일보다 국방비 지출이 적은 셈이다. 따라서 ‘독일 체납’으로 미군을 철수한다는 트럼프 주장은 근거가 없다는 지적이 미국과 유럽 일각에서 나온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오른쪽)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지난해 8월 프랑스 비아리츠에서 열린 주요7개국(G7) 정상회의에서 만나 대화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오른쪽)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지난해 8월 프랑스 비아리츠에서 열린 주요7개국(G7) 정상회의에서 만나 대화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전직 미국 관리를 인용해 트럼프 대통령은 독일이 국방 분야에서 미국을 이용하고 있고, 무역 분야에서는 미국에 너무 많은 자동차를 팔고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고 전했다. 먼저 독일에서 감군을 결정한 뒤 그에 대한 명분을 찾았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주독 미군 감축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2012년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유럽 정치권의 반대에도 독일에서 2개 전투 여단을 철수시켰다. 그로부터 2년 뒤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침공했고 유럽과 미국은 나토를 강화하기로 뜻을 모았다.

주독 미군 감축에 대해 집권 공화당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다. 밋 롬니 공화당 상원의원은 이날 성명을 통해 주독 미군 감축은 “중대한 실수”라고 평가했다. 그는 “러시아와 중국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상호 헌신해야 하는 때에 친구이자 동맹에 대한 모욕”이라면서 “일시적으로 국내 정치에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그 결과는 장기적으로 미국의 국익에 해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제임스 인호프 상원 군사위원장은 트럼프 대통령의 미군 재배치 계획을 지지했다. 그는 “유럽에서 미군의 준비태세를 재정비하는 개념은 타당하다”는 성명도 발표한 바 있다.

워싱턴=박현영 특파원 hypar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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