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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잇따르는 무리수 판결, 정권 눈치보기 아닌가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696호 30면

법원이 납득하기 어려운 판결을 쏟아내고 있다. 이번 주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추행 사건을 둘러싼 의혹을 밝히기 위해 경찰이 신청한 압수수색영장이 잇따라 기각됐다. 박 전 시장 통화내역을 확인하려는 첫 번째 영장 기각은 경찰의 실책도 없지 않다. 이미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된 사인(死因)과 관련한 내용으로 영장을 채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법원은 박 전 시장 휴대전화와 서울시청 사무실에 대한 압수수색영장까지 “필요성이 부족하다”며 기각했다. 피해자가 고소한 사실이 유출됐고, 피해자의 호소를 묵살하고 성추행을 방조한 사람들이 버젓이 시청을 장악하고 있는 만큼 증거 인멸의 우려가 크다. 그런데도 증거 확보를 위한 압수수색이 필요하지 않다고 보는 것은 수사를 하지 말고 진실 규명도 필요 없다는 판단과 다를 바 없다.

‘여권 인사 봐주려 무리한 논리 동원’ 의혹 #사법농단으로 떨어진 신뢰, 더 추락할 수도

강요미수 혐의가 적용된 이동재 전 채널A 기자에 대한 구속영장 발부 사유도 납득하기 어렵다. 이 사건은 기자가 금융사기 혐의로 복역 중인 이철 전 VIK 대표에게 편지를 보내거나 측근을 만나 여권 인사의 비리 제보를 독촉했다는 것이 주요 얼개다. 이 과정에서 기자가 윤석열 검찰총장의 측근인 한동훈 검사장과 짜고 이 전 대표 가족까지 탈탈 털겠다고 협박한 ‘검언(檢言)유착’ 사건이라는 게 수사팀과 여권의 시각이다. 반면 이 기자와 한 검사장 측은 이 전 대표가 MBC와 짜고 카메라까지 대동한 채 이런 상황을 유도한 ‘권언(權言)유착’이라고 주장한다. 검찰은 이 기자와 한 검사장의 공모 여부를 영장에 포함하지도 못했다. 그런데도 영장전담 판사는 “언론과 검찰의 신뢰 회복을 위해”서라는 이유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검찰 고위직과 연결하여”라는 표현을 통해 검언유착을 기정사실로 예단하기도 했다.

여권 인사를 구하기 위해 무리를 하다 보니 억지 논리가 판결문 곳곳에 등장한다. 청와대 근무 당시 비리를 저질러 구속된 유재수 전 금융위 국장에 대해 1심 재판부는 대부분의 뇌물 수수 사실을 인정하고서도 집행유예로 풀어줬다. 이를 위해 일부 공여자에게 부친이 기른 옥수수를 선물한 사실을 끌어와 일방적으로 받기만 한 것이 아닌 서로 주고받는 ‘각별한 사이’임을 강조했다.

대법원은 은수미 성남시장이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사실을 다 인정하고도 벌금 300만원을 선고한 항소심 판결을 무죄 취지로 파기했다. “검찰이 항소이유서에 양형 부당 사유를 분명히 적지 않았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동안 관행적으로 인정해주던 사항을 유독 유력 정치인의 민감한 사건에서만 엄격하게 적용한다 하니 작심하고 봐주기 위해서라는 비판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선거법상 허위사실유포죄로 기소된 이재명 경기지사 상고심 판결에서도 대법원은 TV 토론 활성화를 위해 방어적 거짓말은 인정해야 한다는 논리를 동원해 무죄로 판단했다. 하지만 당시 상황이 과연 상대 후보의 급작스러운 질문에 허겁지겁 대답하다 나온 ‘실수’인지 의문스럽다. 오히려 TV토론에선 작심하고 거짓말을 해도 된다는 선례를 남겼다는 비판이 거센 실정이다.

일련의 사건들에서 예외 없이 친여권 인사들에게 유리한 결론을 내리기 위해 무리한 논리를 동원하는 흐름이 보인다. 이 때문에 현재 진행 중인 김경수 경남지사 사건(드루킹 관련), 조국 전 장관 일가 관련 비리의혹 사건, 울산시장 선거개입 의혹 사건 등에서도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해 교묘한 법 기술을 동원하는 ‘기교(技巧)사법’이 나올까 우려된다.

사법 농단으로 땅에 떨어진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는 무거운 사명을 짊어진 김명수 대법원장은 틈만 나면 ‘좋은 재판’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좋은 재판이란 국민을 중심에 두고, 국민 눈높이에 맞는 재판이라고 설명한다. 과연 최근 나오는 판결들이 좋은 재판의 결과물인지, 이런 판결로 잃어버린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지 사법부 구성원들은 냉철히 따져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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