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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위해감축을 금연정책에 반영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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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옥륜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보건대학원) 한국건강위해감축연구회 회장

문옥륜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보건대학원) 한국건강위해감축연구회 회장

최근 미국 식품의약청(FDA)은 한 담배회사의 궐련형 전자담배 제품을“위험저감 담배제품”으로 승인하였다. 담배 제품은 모두 유해하다는 일반적인 통념에 비추어 이는 매우 의아한 일이다. 식품과 의약품의 안전에 관한 한 세계적으로 가장 까다롭기로 유명한 이 기관이 도대체 왜 이러한 조치를 취하였을까? 그 배경에는 기존 금연정책의 한계 때문에 이를 보완하기 위한 새로운 정책수단 개발의 필요성이 등장한다.

담배에 대하여는 전세계적으로 매우 강력하고 다양한 금연정책이 추진되고 있다. 예를 들면, 담배가격의 대폭 인상, 판매 촉진과 광고 등의 제한, 경고 문구와 그림의 부착, 흡연구역의 광범위한 제한, 청소년에 대한 판매금지 등이 그것이다. 그 동안 우리나라도 이러한 추세에 맞추어 강력한 금연정책을 취하여 왔다. 그 결과, 우리나라 성인의 흡연율이 1998년 35.1%에서 2018년 22.4%로 낮아지는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최근 5년간에는 담뱃값의 대폭 인상을 포함한 기존의 금연정책이 강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흡연율이 더 이상 낮아지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흡연자가 담배의 위해성을 모르거나 이를 알리는 공익광고가 부족해서도 아니고 금연에 관한 사회적 운동과 관심이 약해서도 아닐 것이다.

우리가 눈 여겨 보아야할 것은 기존의 금연정책이 흡연자에 대하여 사회적 압력과 규제를 가하고 비난, 훈계하여 무조건 금연하라고 강요해왔다는 점이다. 현대과학은 흡연이 니코틴 중독을 초래한다고 밝혔다.  니코틴에 중독되어 담배를 끊을 수 없는 흡연자 개개인의 욕구와 사정에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아니한 셈이다. 좋은 정책은 소비자에게 선택의 폭을 넓혀주는 것이다. 흡연자들이 흡연을 단계적으로 줄이거나 보다 위해성이 저감된 제품을 자발적으로 선택하여 종국적으로 금연에 이르도록 하는 단계적 접근방식이 이에 해당한다,

이러한 접근방식은 술, 담배, 마약 등의 중독을 치료할 목적으로 고안된 건강위해감축(harm reduction)이라는 개념에 기초하고 있다. 흡연자가 위해성을 판단할 수 있도록 담배의 성분을 공개하며, 그 위해성의 정도에 비례하여 규제를 함으로써 위해성이 높은 일반 궐련담배를 서서히 사라지게 하자는 것이다. 미국 FDA가 “위험저감담배제품”을 승인한 것은 건강위해감축 이론에 근거해서 해당 제품이 일반 궐련담배에 비추어 유의미하게 위해성이 저감되었음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정책당국은 ‘무조건 금연’이라는 기존의 금연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그 결과 일반 궐련담배보다 위해성이 훨씬 저감될 수 있는 궐련형 및 액상형 전자담배를 일반 궐련담배와 동등하거나 오히려 그 이상으로 규제하는 정책이 제21대 국회 벽두부터 추진되고 있다.

청소년 흡연예방 위해 가향 담배 규제부터  

현재 국회에 발의된 국민건강증진법 개정안들을 보면, 청소년을 비롯한 신규 흡연자의 흡연 시작을 방지하기 위해 가향물질의 첨가를 금지하는 등 건강에 더욱 해로운 일반 궐련담배에 대한 규제 강화는 눈에 띄지 않는다. 한 여론조사기관의 설문 결과에 따르면, 청소년 중 62.7%가 가향 담배(캡슐, 감미필터 등 사용한 일반 궐련담배)로 흡연을 시작했고, 이 중 89.6%는 캡슐담배가 흡연 시작에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위 개정안에는 이러한 시급한 정책 보다는 오히려 위해성이 덜 한 궐련형 및 액상형 전자담배를 대폭적으로 규제하기 위해서 흡연전용기구에 대하여도 판촉을 금지하고 경고그림과 문구도 붙이자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규제는 결과적으로 담배를 끊을 수 없는 흡연자들이 금연을 하기보다는 위해성이 더 높은 일반 궐련담배를 계속하여 흡연하도록 하는 데 일조할 것으로 판단된다. 정책 시행의 우선순위를 재고할 필요가 있다.

흡연은 흡연자 자신의 건강을 해칠 뿐만 아니라 공중보건상의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 따라서 흡연은 결코 권장될 일이 아니다. 그러나 금연이라는 정책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무조건 금연만을 외치지 말고 흡연자의 금연을 유도할 수 있는 실용적인 접근방법으로 기존 금연 정책의 한계점을 보완하여야 한다. 흡연자가 담배의 위해성을 판단하여 위해성이 덜 한 제품을 자발적으로 선택하여 종국적으로는 금연에 이르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건강위해 저감 정책이 필요하다. 이러한 정책은 금연에 이르는 길을 다양화하여 흡연자의 선택지를 넓혀 줌으로써 흡연자의 자기결정권을 신장시키는데 도움이 된다.

정책의 목적이 가치판단에 근거하더라도 정책을 실현하는 수단은 정책 수용자의 구체적 사정에 맞게 세밀하고 실용적이어야 비로소 원래 목적이 달성될 수 있다. 현재와 같이 위해성이 덜 한 전자담배를 위해성이 높은 일반 궐련담배와 동등하거나 그 이상으로 규제하는 것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것과 같은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하지 않을까 우려된다.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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