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표준 치료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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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의술은 세계 어느 곳을 가도 똑같을까? 그렇지 않다. 한나라에서 표준적인 처방이 이웃나라에서는 결함있는 요법으로 여겨진다. 구미 선진국 사이에서도 같은 병에 대한 치료법이 아주 다른 경우가 많다.

암의 경우 어떤 곳에서는 집중적인 화학요법을 불가피한 처방으로 보는 반면, 다른 곳에서는 환자를 괴롭히는 잔혹한 방법으로 여긴다.

미국에서 너무 높다고 진단받은 혈압이 영국에서는 정상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프랑스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혈관 확장제가 미국에서는 효과가 없는 것으로 취급당한다.

미국에서 수술대에 오르는 많은 환자들은 다른 나라에 있었다면 수술받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고 한다. 맹장수술은 독일이 수위를 달린다. 독일 의사들은 영국 의사보다 강심제를 6~7배 더 처방하는 대신에 항생제를 훨씬 더 적게 쓴다. 프랑스 의사들은 좌약을 미국 의사보다 7배나 많이 처방한다.

서구인의 체질이 나라마다 그렇게 다를 리 없다. 치료법의 차이가 왠지 찜찜하고 미덥지 못한 인상을 풍기는 까닭이다.

그런가 하면 같은 나라 안에서도 고객에 따라 치료법은 달라진다. 1990년대 스위스 테신(tessin)주 보건국의 통계자료에 따르면 의사의 친척이 아닌 환자들은 수술을 훨씬 더 자주 받는다. 일반환자는 의사의 친척에 비해 편도선 수술을 46%, 서혜 헤르니아(탈장의 일종) 수술을 53%, 치질 수술을 83% 더 받았다. 이건 의사의 양심문제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의료수준이나 의사의 양심은 구미 선진국이나 스위스보다 격이 높을까?

지난해 세계보건기구(WHO)의 '세계보건 2000' 보고서에 드러난 한국의 의료수준은 세계 58위. 그러면서 제왕절개 수술에 의한 분만비율은 43%로 세계 1위, 자기공명영상(MRI)촬영장치 보급률은 1백명당 4.7대로 세계 3위라는 기형적 기록을 갖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오는 15일부터 보험진료비 심사를 엄격하게 한다고 밝혔다. 병.의원이 정부의 요양급여 기준보다 약을 과다 처방하면 초과분을 삭감하고 환자의 질환과 동떨어진 처방을 하면 해당 진료비는 지급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좋은 이야기다. 하지만 적정 진료를 위해선 미국처럼 어떤 질병에는 어떤 처방이 필요한지를 정해 놓은 '표준치료' 시스템부터 먼저 확립해야 하지 않을까. 그 다음엔 의사들도 스스로 물어봐야 할 것이다. "내 가족이라도 이 치료법을 권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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