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여성 보호보다 ‘박원순 보좌’ 급했던 젠더 특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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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적인 선택을 부른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추행 사건과 관련해 서울시청사에서 박 전 시장과 같은 층을 쓰며 곁에서 보좌했던 ‘6층 사람들’이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특히 사건의 '키맨' 중 한 명인 임순영 서울시 젠더특별보좌관은 박 전 시장의 '불미스러운 일'에 대한 소식을 접한 뒤 이를 직접 보고하고 대책을 논의한 것으로 나타나면서 본래 직분인 젠더 평등보다는 시장 개인의 보좌에 신경쓴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무슨 일 있으신가" '불미스러운 일' 먼저 알린 젠더 특보 

임순영 서울시 젠더특별보좌관. 연합뉴스.

임순영 서울시 젠더특별보좌관. 연합뉴스.

임 특보는 지난 8일 오후 3시께 박 전 시장의 집무실을 찾아 “실수한 것이 있느냐”고 물었다. 박 전 시장의 성추행 고소장이 경찰에 접수되기 1시간 반 전 시점이다. 임 특보는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주변으로부터 ‘불미스러운 일이 있으니 확인해보라’는 말을 들었고, 이후 박 전 시장에게 찾아가 물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성추행 사건 피고소인이 된 박 전 시장에게 피해자 움직임 관련 정황을 먼저 알려준 셈이다. 임 특보는 ‘모르고 한 일’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8일 관련 사실을 처음 전해 들었을 때나 그날 저녁 박 전 시장과 이에 대해 회의를 했을 때도 성추행 고소 여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가 다름 아닌 젠더 특보인 데다 박 전 시장 일정이 바쁜 와중에도 “급히 찾아 잠깐 만났다”고 한 점을 미뤄보면 성추행 사건과 관련된 일임을 짐작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성추행 피해 사실, 알지 못했다는 젠더 특보 

고 박원순 서울시장을 성추행 혐의 등으로 고소한 피해여성을 대리하는 김재련 변호사가 13일 오후 서울 은평구 녹번동 한국여성의전화 사무실에서 연 `서울시장에 의한 위력 성추행 사건 기자회견'에서 피해여성을 텔레그램 비밀 대화방에 초대한 스마트폰 화면 사진을 공개하고 있다. 현장 기자단.

고 박원순 서울시장을 성추행 혐의 등으로 고소한 피해여성을 대리하는 김재련 변호사가 13일 오후 서울 은평구 녹번동 한국여성의전화 사무실에서 연 `서울시장에 의한 위력 성추행 사건 기자회견'에서 피해여성을 텔레그램 비밀 대화방에 초대한 스마트폰 화면 사진을 공개하고 있다. 현장 기자단.

임 특보가 단순히 이를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인지했을 뿐 성추행 의혹에 대해서는 인지하지 못했다 해도 문제는 남는다. 피해자 측에 따르면 해당 사건은 4년간 지속했다. 피해자 A씨의 변호를 맡은 김재련 변호사는 “A씨가 비서직을 수행한 4년을 포함해 다른 부서로 발령 난 이후인 2020년 2월에도 (성추행이) 지속했다”고 주장했다. A씨가 비서직을 수행한 기간은 2015년 7월~2019년 7월이다. 임 특보가 지난해 1월 임명됐다는 점을 고려하면 반 년간 이 사실을 몰랐던 셈이다.

젠더 특보는 ‘성평등 도시 구현’을 위해 지난해 1월 서울시가 처음으로 신설한 지방전문임기제 3급(국장급) 보직이다. 서울시는 당시 임 특보를 임명하면서 “성평등 정책에 힘을 쏟겠다는 시장의 의지가 반영된 인사”라며 “임 특보는 젠더 관련 이슈를 전문적으로 자문하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에 따르면, 피해자 A씨는 서울시 내부에 도움을 요청했음에도 ‘시장은 그럴 사람이 아니다’며 단순한 실수로 받아들이라고 하는 반응이 이어졌다. 성적 괴롭힘에 대해 한 비서관에게 부서를 옮겨 달라고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도 한다. 젠더 특보까지 두어 양성 평등을 실현하겠다던 서울시 방침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다는 지적이 나오는 대목이다.

정보유출 경로 '오리무중'…6층 사람들은 연락 두절

고한석 전 서울시장 비서실장이 15일 오후 서울 성북경찰서에서 박원순 서울시장 사망 관련 참고인 조사를 마친 뒤 청사를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고한석 전 서울시장 비서실장이 15일 오후 서울 성북경찰서에서 박원순 서울시장 사망 관련 참고인 조사를 마친 뒤 청사를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임 특보에게 박 전 시장의 ‘불미스러운 일’을 전해준 주변 인사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서울시 내부에서는 외부 인사일 가능성이 제기된다. 한 서울시 관계자는 “6층 정무라인이 이를 인지했다면 임 특보가 아닌 고한석 전 비서실장이 직접 박 전 시장에게 보고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임 특보는 박 전 시장이 활동했던 희망제작소 출신으로 한국성폭력상담소 총무와 남인순 더불어민주당 의원 보좌관을 거쳤다.

야당은 경찰 소속으로 서울시청에 파견 근무 중인 치안협력관이나, 출입 정보관으로 협조 업무를 맡고 있는 2명의 직원 중 누군가가 성추행 사건 수사상황을 유출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경찰은 “서울시와 경찰의 접점은 없다”며 “이번 피소 건에도 어떤 역할을 했는지 아는 바가 없다”고 부인했다. A씨가 고소를 접수한 당일 경찰이 청와대에 이 사실을 보고한 것은 파악됐지만, 청와대 역시 박 전 시장에게 피소 사실을 알리지는 않았다는 입장이다.

피해자 A씨가 고통을 호소했다고 한 비서실의 직원을 비롯해 박 전 시장이 직접 발탁해 지근거리에서 그를 보좌했던 정무라인 인사들은 현재 대부분 연락이 끊긴 상태다.

허정원 기자 heo.jeongw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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