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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방접종엔 무관심…전염병 돌고서야 호들갑

중앙일보

입력

얼마 전 홍역이 크게 번졌을 때 동료 교수 李모씨는 10년 전의 씁쓸한 기억이 떠올랐다.

그는 당시 영국 연수를 서둘러 준비하는 바람에 자녀들의 예방접종 증명서를 챙기지 못했다. 그 바람에 영국에 들어가 접종 증명서를 못 내고 있었는데 어느날 동네 보건소 직원이 찾아왔다.

그는 "자녀의 예방접종 증명서가 없으니 한국에서 예방주사를 맞았더라도 여기에서 다시 예방접종을 한 뒤 그 증명서를 학교에 내야 한다" 며 친절히 안내해 주었다.

李교수는 부끄럽게 생각하며 그의 말대로 했다. 선진국에선 각종 예방접종 증명서를 유치원.초등학교 입학 및 전학 때 반드시 내도록 하고 추후 관리를 한다. 백신 접종률을 높여 전염병의 유행을 막기 위한 일종의 '방역 기초' 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기초가 부실하다. 홍역이 창궐하고 나서야 올해부터 뒤늦게 초등학교 입학 때 홍역예방 접종 증명서를 내게 했을 정도다.

이에 따라 접종 증명서를 따로 보관하지 않은 학부모들은 자녀에게 홍역 백신을 1, 2차 모두 접종시켰더라도 사유서를 써야 하는 등 번거로움을 겪어야 한다.

예방 접종률이 낮은 것도 문제다. 홍역의 경우 1차가 80%선, 2차는 30%선에 불과하다.

시립병원 등 공공의료기관이 턱없이 부족하고 제 구실을 못하는 것이 큰 원인이다. 보건소는 무료이기는 하지만 민간 병.의원처럼 스스로 찾아오는 환자들에게만 백신을 접종하고 있다.

최근의 한 연구 결과를 보면 1999년 홍역 백신 접종자 가운데 37%만이 보건소에서 예방주사를 맞았다. 96년의 42%보다 오히려 낮아졌다.

예방 백신 접종 증명서의 초등.중학교 제출을 의무화해 철저히 관리하고 병.의원에 가기 힘든 사람은 보건소에서 직접 찾아가 예방주사를 놓아 주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백신 접종률을 95% 이상으로 끌어올려 전염병 발생을 효과적으로 억제할 수 있지 않을까.

기모란 <을지의대 교수.예방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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