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범적"이라던 서울시 성희롱 매뉴얼…6층 비서실은 외면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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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서울시장이 2011년 11월 취임 당시 집무실 한 쪽의 침실을 공개하고 있다 . [중앙포토]

박원순 서울시장이 2011년 11월 취임 당시 집무실 한 쪽의 침실을 공개하고 있다 . [중앙포토]

고 박원순 서울시장의 성추행 의혹 사건을 계기로 서울시가 갖고 있던 성폭력 방지와 가해자 처벌을 규정한 매뉴얼이 무용지물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고 박 시장이 취임 후 세 차례 이상 발표한 성폭력 방지·대처 매뉴얼은 모범사례로 꼽혔지만 정작 시장 본인과 6층 비서실에서는 매뉴얼이 전혀 작동하지 않았던 셈이다.

14일 서울시의 ‘직장 내 성희롱 재발 방지 종합대책’과 ‘서울시 성희롱‧성폭력 및 2차 피해 예방대책’ 등에 따르면 성희롱 신고가 접수되는 즉시 가해자를 업무에서 배제하고 피해자와 분리해야 한다. 하지만 고 박 시장을 고소한 측의 지난 13일 기자회견에 참석한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장은 “피해자가 서울시 내부에도 도움을 요청했으나 ‘시장은 그럴 사람이 아니다. 단순 실수로 받아들이라’며 피해를 사소하게 여겼다”며 “부서 변경을 요청했으나 시장이 승인하지 않는 한 불가능했다”고 밝혔다.

박 시장, “성희롱 행위 시 무관용 원칙”

2018년 5월 서울 월드컵공원에서 열린 '제18회 여성마라톤대회' 개회식에서 박원순 서울시장이 축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2018년 5월 서울 월드컵공원에서 열린 '제18회 여성마라톤대회' 개회식에서 박원순 서울시장이 축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서울시는 2012년, 2014년, 2018년 잇따라 성희롱 예방 대책을 내놨다. 박 시장이 취임 후 가장 먼저 발표한 대책은 2012년 1월 발표한 ‘성희롱·성차별 없는 평등한 직장 만들기 종합계획’이다. 이 계획안에는 성희롱 발생 시 한국여성의전화에 상담·사건조사 의뢰, 여성가족정책실장 핫라인 개설, 성희롱 예방 교육 확대 등이 담겼다.

2014년엔 한층 구체적인 ‘성희롱·언어폭력 재발 방지 종합대책’이 나왔다. 당시 박 시장은 직접 서울시 직원들에게 "성희롱 행위 시 무관용의 원칙을 적용하겠다"는 서한을 보냈다. “공무원의 일탈 행위는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서울시정을 바라보는 시민들의 신뢰와 연결된 문제이자, 맡은 바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선량한 대다수 직원의 사기와도 관련된 문제”라며 “언어폭력, 성희롱 행위 시 무관용의 원칙에 따라 강화된 징계 절차를 적용하고, 부서장의 귀책사유가 있는 경우 연계책임도 묻도록 하겠다”는 내용이다.

"성희롱 발생하면 실·본부·국장도 연대책임" 

서울시가 지난 2018년 배포한 성희롱 예방 대책 자료. [서울시 홈페이지]

서울시가 지난 2018년 배포한 성희롱 예방 대책 자료. [서울시 홈페이지]

‘미투 운동’이 활발하던 2018년엔 ‘서울시 성희롱‧성폭력 및 2차 피해 예방대책’을 세웠다. 당시 서울시는 보도자료를 통해 “'미투(#MeToo)' 운동이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기존 서울시 성희롱 예방대책을 냉정히 평가해 피해자 관점에서 개선‧보완했다”고 전했다. 이 대책엔 직장 내 성희롱이 발생했을 시 가해자가 속한 실·본부·국장에게도 연대책임을 묻겠다는 내용 등이 담겼다.

서울시가 이 같은 성희롱 예방 매뉴얼을 갖고 있었으면서도 정작 시장에게는 적용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나면서 서울시 책임을 묻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주호영 미래통합당 원내대표는 14일 “서울시 비서실 차원의 성추행 방조, 무마가 지속해서 이뤄졌다는 제보를 받았다”며 “제보가 사실이라면 지난 4년간 서울시장 비서실장 자리를 거쳐 간 분들, 젠더 특보 등도 직무 감독을 소홀히 한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모범적 매뉴얼 작동 안해…서울시 책임 물어야"  

13일 오후 서울 은평구 한국여성의전화 교육관에서 '서울시장에 의한 위력 성추행 사건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한국성폭력상담소와 한국여성의전화가 기자회견을 주최했다. 뉴스1

13일 오후 서울 은평구 한국여성의전화 교육관에서 '서울시장에 의한 위력 성추행 사건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한국성폭력상담소와 한국여성의전화가 기자회견을 주최했다. 뉴스1

장미혜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서울시의 성희롱 방지·대처 매뉴얼은 모범사례로 꼽힐 정도로 상당히 잘 갖춰져 있다”며 “기자회견을 통해 해당 매뉴얼이 현실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게 드러났다”고 지적했다. 장 연구위원은 “미투 운동 이후 기관별로 성희롱 방지 대책이 우후죽순 쏟아졌지만, 실제 실효성이 있는지 점검해봐야 한다”며 “매뉴얼 뿐 아니라 성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개선하는 데 도움을 줄 교육 프로그램 등이 절실하다”고 덧붙였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도 “시민 인권보호관까지 둔 서울시에서 왜 고소인의 이야기를 묵살했는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며 “성추행 고소 건과 별개로 국가인권위원회, 여성가족부 등 유관기관에서 서울시를 철저히 조사를 해야 한다”고 밝혔다.

김지아 기자 kim.ji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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