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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땀흘려 만든 땅 농사만이라도”…철원 민통선 농지 임대계약 만료 농민들 호소

중앙일보

입력

강원도 철원군 민간인통제선 내 유정리 산이 40년 전인 1980년 개간을 통해 벼농사가 가능한 농지로 변해있는 모습. 사진 유정리 농민

강원도 철원군 민간인통제선 내 유정리 산이 40년 전인 1980년 개간을 통해 벼농사가 가능한 농지로 변해있는 모습. 사진 유정리 농민

“산을 개간해 논을 만들고 물이 부족해 저수지를 크게 하면서 40년간 땀 흘려 만든 땅인데 농사만이라도 짓게 해주세요.”
 강원도 철원군 민간인통제선(이하 민통선) 마을인 유정리에서 벼농사를 짓는 김경묵(69)씨는 최근 한국농어촌공사로부터 “올해를 끝으로 임대 계약을 연장하지 않고 토지를 공개 매각하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김씨처럼 농어촌공사에 매년 임대료를 내고 유정리에서 벼농사를 짓는 농민은 13명. 대상 농지만 6만7000여㎡에 이른다.

산 개간, 저수자 확장, 전봇대까지 농민이 설치 #장기임대·수의계약해 농민들 농사 짓게 해줘야

 김씨는 “당시 농민들이 등기도 없는 산을 개간하면서 무연고 묘와 지뢰를 제거했고 1평(3.3㎡)당 795원의 개간비도 사비로 냈다”며 “농사를 짓는 과정에서도 농민들이 전기가 필요해 전봇대를 들여오고 다리를 놓는 등 많은 노력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오랜 시간 농민들이 공을 들인 땅인 만큼 농어촌공사에서 공개 매각이 아닌 장기임대 또는 수의계약을 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호소했다.

 민통선 안쪽에 있는 유정리 땅은 40년 전인 1980년엔 미등기 산이었다. 식량 증산이 중요하던 시기 당시 여당인 민주정의당과 지역 영세 농민들은 이 일대를 개간하기로 계획했다고 한다. 이후 지역 영세 농민들은 1년 동안 개간 작업을 거쳐 이듬해인 1981년부터 농사를 시작했다. 소유권 등기는 1987년 한국농어촌공사의 전신인 중앙농지개량조합이 일제 강점기 때 작성된 문서 등을 근거로 했다.

1980년 미등기 산 1년간 개간해 농토로

강원도 철원군 민간인통제선 내 유정리에서 벼농사를 짓는 농민들. 연합뉴스

강원도 철원군 민간인통제선 내 유정리에서 벼농사를 짓는 농민들. 연합뉴스

 개간지에서 벼농사를 짓는 건 쉽지 않았다. 몇 년간 비료를 쏟아붓는 등 온갖 노력에도 벼가 자라지 않자 상당수 농민은 농사를 포기하고 떠났다. 이후 남은 1세대 농민과 새로 들어온 2세대 농민이 오랜 기간 벼농사를 이어왔다. 이처럼 유정리 땅은 개간 이후 1~2세대의 땀과 노력이 곳곳에 배어있다는 게 이 지역 농민들의 주장이다. 유정리에서 8250㎡ 규모의 벼농사를 짓는 2세대 농민 장홍선(50)씨는 개간에 참여한 농민은 아니지만 비슷한 어려움을 겪었다.

 농어촌공사는 2015년 경지 정리를 하면서 유정리 일대 불규칙한 토지를 직사각형 형태로 만들었다. 경지 정리는 농업노동의 생산성을 증대할 목적으로 영농기계화, 작업의 생력화, 용배수관리의 원활화, 영농의 합리화 등을 시행하는 토지개량사업이다.

"2015년 경지 정리로 옥토 만드느라 고생" 

강원도 철원군 민간인통제선 내 유정리 산이 40년 전인 1980년 개간을 통해 벼농사가 가능한 농지로 변해있는 모습. 산을 개간해 만든 농지라 계단식으로 되어 있다. 사진 유정리 농민

강원도 철원군 민간인통제선 내 유정리 산이 40년 전인 1980년 개간을 통해 벼농사가 가능한 농지로 변해있는 모습. 산을 개간해 만든 농지라 계단식으로 되어 있다. 사진 유정리 농민

 당시 경지 정리로 바닥이 물렁물렁해지면서 농기계가 수차례 빠지는 등 농민들이 농사를 짓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런 이유로 농민들은 한동안 농기계 없이 손으로 모를 내고 오랜 기간 물과 밑거름을 공급해 바닥을 다시 딱딱하게 만들었다.

 장씨는 “경지 정리를 할 경우 다시 농사짓기 좋은 땅이 되기까지 3~4년 걸린다”며 “땅을 팔 계획이었으면 그때 팔았어야지 힘들게 다시 농사지을 수 있는 땅을 만들어놨더니 이제 나가라는 게 말이 되느냐”고 하소연했다.

 하지만 농어촌공사는 농민들의 요구를 들어주긴 어렵다는 입장이다. 농어촌공사 측은 현재 유정리 농지 매각은 검토 중인 것은 맞지만 확정한 사항은 아니라며 안정적인 용수 공급과 시설물 유지 관리를 위해서는 일부 자산을 매각해 재원으로 써야 하는 실정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농민들의 수의매각 요구에 대해서는 부동산 매각은 공개경쟁 입찰이 원칙이며 해당 토지의 경우 준정부기관 계약사무규칙 등 규정에 따라 수의매각이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농어촌공사 관계자는 “농민들의 사정은 알지만, 최초 농지 개간에 기여한 이들이 현재까지 해당 토지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등 농민들이 제출한 서류를 검토해 토지 매각 추진을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철원=박진호 기자 park.jin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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