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규의 지리산 가을편지] 고라니의 기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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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고선녀시여, 저 반야봉 고라니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저는 몸무게 10kg, 젖꼭지 네 개인 고대(古代)형 노루입니다. 한번도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거나 그럴 생각마저 없었으니 당연히 뿔 하나 없지요. 초식이니 제 몸에 필요한 만큼의 풀잎만 탐할 뿐 그 이상의 욕심을 가진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마고선녀시여, 눈앞이 캄캄합니다. 그제는 어린 다람쥐가 죽더니, 어젯밤엔 저의 약혼자가 죽었습니다. 만복대의 억새 밭에 사는 그가 나를 찾아오다가, 지리산 관통도로인 861번 국도를 넘다가 질주하는 승용차에 치였지요. 그토록 매력적이던 송곳니의 그가 없으니, 제 눈 밑에 향기를 분비하던 작은 샘마저 바짝 마르고 말았습니다.

노고단의 마고선녀시여, 성삼재 도로를 폐쇄하지는 못하더라도 한밤중의 차량통행만은 제발 막아주소서. 단풍놀이 관광차량들이 최고시속 20km를 넘지 못하게 해주시고, 내리막길엔 브레이크 파열사고가 날지 모르니 1단 기어로 천천히 내려가게 해주소서. 사람들이 단풍잎을 어여삐 여기듯이 다람쥐며 너구리며 오소리도 사랑하게 해주소서.

이원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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