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 피해자 고(故) 심진구씨의 재심 재판에서 "고문은 없었다"고 위증한 혐의로 기소된 76세의 전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수사관 A씨가 24일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다. 심씨의 유가족을 대리한 변호사도 "실형을 예상하진 못했다"고 말할 만큼 이례적인 형량이다.
징역 1년 6월, 고문 피해자 재심 재판서 위증 혐의
판결을 선고한 서울중앙지법의 변민선 부장판사는 "피고인은 1986년 심씨에게 가혹행위를 저지른 이후 무려 34년간 자신의 저지른 범죄에 대해 사과하거나 반성하지 않는다"며 "정의와 상식에 부합되게 피고인을 엄하게 처벌할 필요성이 있다"고 밝혔다.
고인의 유족, 공소시효 한달 남기고 고소
이번 판결은 심씨의 유족이 지난해 3월, A씨의 위증죄 공소시효를 약 한달 가량 남기고 고소하며 시작됐다. 선고가 내려진 법정에는 질병으로 세상을 떠난 심진구씨를 대신해 그의 아내와 딸이 참석했다. 심씨는 2013년 7월 11일 재심 재판에서 최종 무죄 판결을 받았고, 2014년 11월 26일 자신을 고문한 전 안기부 수사관들에게 일부 손해배상도 받아냈다. 그리고 3일 뒤인 2014년 11월 29일 세상을 떠났다.
재판장은 판결문에 "가혹행위를 밝히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던 심씨가 사망해 피고인으로부터 참회나 사죄를 받을 기회조차도 없게 됐다"고 적었다. 심씨 유가족의 고소대리인인 최건섭 변호사는 "심씨를 대신해 그의 유가족들은 이번 판결에 감사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A씨는 1심 판결에 불복해 항소한 상태다.
심씨는 왜 억울하게 구속됐나
1980년대 노동 운동을 했던 심씨는 당시 대학가에 주사파 바람을 일으킨『강철서신』의 저자 김영환씨와 함께 살다 구속돼 1987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민족해방노동자당 사건에 연루돼 간첩으로 몰린 것이다.
판결문에 따르면 고졸 출신으로 구로지역 삼립식품에서 노동자로 일했던 심씨는 운동권이나 주사파 활동 보다는 노동 운동에 투철했다. 심지어 이번에 구속된 A씨마저 노무현정부에서 시작해 이명박 정부까지 이어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연루자가 다들 서울대생인데 심진구만 유일하게 노동자라…이틀 정도 집중적으로 조사했는데 아무것도 없었다"고 진술할 정도였다.
심씨의 고문 고백
하지만 그런 심씨도 안기부의 고문과 허위 자백을 피해갈 순 없었다. 심씨는 집행유예로 출소한 직후인 1987년 김영환씨의 재판에서 "학생이 아니었기에 학생들보다 더 심한 고문을 받았다"고 답변했고, 1999년 월간 '말'지 인터뷰에선 "(수사관들이) 성기를 책상위에 올려놓고 내려치고, 몽둥이로 목을 조르고, 내 몸에서 흘러나와 바닥에 고인 피를 막대 걸레로 닦아 내 손으로 짜야했다"고 고백했다.
심씨는 "35일 동안 하루에 두 시간 정도만 잠을 잘 수 있었고 나머진 고문의 연속이었다"고도 했다. 심씨는 2004년 자신을 고문한 안기부 수사관들을 고소했지만 공소시효 만료로 기각됐다.
재판부는 심씨가 남긴 진술을 믿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심씨가 집행유예로 풀려난 뒤 약 27년간 각종 언론 인터뷰와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 과거사진상위원회, 형사재심청구, 손해배상청구, 형사고소에서 일관되게 밝힌 옛 안기부의 가혹행위 진술이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알 수 없을 정도로 상세하며 구체적"이라고 판단했다. 당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언급하며 심씨가 수사를 받던 시기에는 "불법구금이 관행적으로 이뤄졌다"고도 했다.
반면 A씨가 2012년 재심 재판 등에서 "고문이 없었다"고 말했거나 자신의 재판 중에 "인간적인 훈계 차원의 가벼운 꿀밤 정도만 때렸다"고 밝힌 것은 도저히 믿기가 어려운 위증이라 판단했다. 그러면서 재판장은 공소시효가 지나 가혹행위는 처벌할 순 없지만 "국가기관의 수사관이 국민을 상대로 고문을 하는 것은 민주주의에 기본질서를 파괴하는 중대범죄이자 반인륜범죄에 해당한다"며 A씨를 질타했다.
박태인 기자 park.taei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