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람사전

냉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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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정철 카피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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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과 경쟁해야 할 녀석이, 국수와 경쟁해야 할 녀석이, 짜장면 짬뽕과 경쟁해야 할 녀석이 이 모든 경쟁을 뿌리치고 훨훨 날아올랐다. 저 위에서 평양과 함흥이 경쟁한다. 천재다.

『사람사전』은 ‘냉면’을 이렇게 풀었다. 왔다. 냉면의 계절이. 냉면 마니아들은 한겨울 덜덜 떨며 먹는 평양냉면을 으뜸으로 친다지만, 나 같은 어설픈 냉면주의자는 녀석을 더위에 말아먹는다.

마니아들은 이 천재의 몸값에 대체로 동의하는 분위기다. 그런데 나는 녀석의 가격이 불편하다. 냉면 한 그릇을 돋보기 들고 들여다본다. 면. 육수. 편육 두어 점. 무 몇 조각. 삶은 계란 반쪽. 이게 끝이다. 육수 속에 온갖 재료와 정성과 비법이 스며들어 있다는 건 인정하지만 가격엔 동의가 잘 안 된다.

사람사전 6/24

사람사전 6/24

특히 계란 반쪽. 나는 냉면 위에 올라앉은 이 반쪽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싹둑 절반일까. 분식집 라면도 계란 하나 통 크게 풀어주는데 냉면은 왜 반쪽일까. 왜 누구도 냉면집의 이런 쩨쩨한 레시피에 항의하지 않는 걸까.

이런 궁금증에 답을 준 건 재작년 남북정상회담이었다. 그때 옥류관 냉면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반쪽이니까 계란도 반쪽인 거야. 냉면 먹을 때마다 우리가 반쪽임을 기억하라고 평양도 함흥도 반쪽만 내놓는 거야.

두 반쪽 사이가 불편해지고 있다. 손에 잡힐 것 같았던 평화가 다시 멀어지려 한다. 또 견뎌야겠지. 잘 견뎌야겠지. 오늘 점심은 냉면으로 해야겠다. 가격이 조금 불편하지만 남북이 등 돌리는 것만큼 불편한 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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