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대통령 ‘인내’ 이전에 냉정한 대응이 절실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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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문재인 대통령이 17일 친여 성향 외교안보 원로들과의 오찬에서 “계속 인내하며 남북 관계 개선을 도모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북한이 개성 남북 공동연락사무소 폭파에 이어 개성공단·DMZ 초소 병력 투입 등 폭거를 이어가는 상황에서도 “참고 기다리겠다”고 한 것이다. “대북 전단 살포를 못 막은 게 아쉽다”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 비핵화에 동의했지만 밑(실무진)의 반대로 이뤄지지 못해 안타깝다”는 언급도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다. 비핵화 약속을 어기고 어렵사리 성사된 남북 간 합의를 일방적으로 깨면서 국민 세금 170억원이 들어간 사무소 건물까지 폭파해 평화를 바라는 모든 이의 기대를 저버린 건 북한이다. 그런데 탈북 단체의 전단 살포와 미국 행정부의 ‘발목잡기’가 남북 관계 파탄의 근본 원인이라면 납득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파탄 원인은 전단·미국 아닌 북한의 폭거 #‘북 비핵화만이 해법’ 직시, 정책 조정하길

이런 인식은 현실에 기초하지 않은 사상누각식 접근이다.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정부가 ‘인내’할수록 북한은 더욱 기세등등하게 남측을 위협·조롱할 것이다. 모처럼 기선을 잡은 김에 최대한 챙길 것을 챙기겠다는 전략이 뻔히 보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북한은 휴전선이나 서해 북방한계선(NLL) 일대 군사 도발, 드론을 동원한 대남 전단 살포 등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를 괴롭힐 가능성이 크다. 정부가 그때마다 ‘인내’만 되뇌며 양보를 거듭한다면 우리 국민의 인내심도 바닥나 정부의 대북 정책 동력은 뿌리째 실종될 우려가 있다.

사태 해결의 궁극적 열쇠를 쥔 미국의 태도도 주목된다, 문 대통령이 원로들과의 오찬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신뢰가 돈독해 북·미, 남북 관계가 개선될 여지가 있다”고 언급한 지 몇 시간도 안 돼 트럼프 대통령은 기존의 대북 제재 행정명령을 1년 더 연장하며 북한을 ‘비상하고 특별한 위협’으로 규정했다. 한국을 협박해 미국을 움직여 보려는 북한의 술수에 대해 “당신들이 무슨 짓을 해도 ‘선(先) 비핵화 후(後) 제재 해제’ 원칙은 바뀌지 않는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효력이 연장된 행정명령 6건은 북한 해외 자산 전면 동결과 노동자 송출 금지, 금융 세컨더리 보이콧 등을 담고 있다. 아무리 ‘투사’ 통일부 장관을 임명해도 이런 미국의 철벽 제재망이 유지되는 한 우리가 독자적으로 북한에 해줄 수 있는 일을 찾기란 불가능하다.

정부는 이런 현실을 직시하면서 냉정하게 대처해야 한다. 문 대통령은 지난 3년간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과잉 평가하고 대화에만 매달렸던 대북 정책의 실패를 돌아보고, 협상과 제재를 병행하는 현실적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또 추가 도발에 대비해 군의 방위태세를 빈틈없이 점검하고, 느슨해진 한·미 동맹을 신속히 재건해야 한다. “비핵화 협상 복귀만이 모든 문제의 해법”임을 설득해 북한을 대화 테이블로 인도하는 노력도 병행해 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