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미래] "과학 우대" 세종대왕이 그립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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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3면

세종 26년(1444년)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가 훈민정음이 '야비하고 상스러운 무익한 글자'라며 창제를 반대하는 상소를 끊임없이 올렸다. 훈민정음을 공포하기 2년 전이다.

이에 대해 세종대왕은 "그대들이 운서(韻書)가 무엇이며, 사성칠음(四聲七音)의 글자가 몇 개나 있는 줄 아는가?"라고 반문하며 상소를 일축했다. (세종실록). 자신보다 음운에 대해 많이 아는 신하가 없다는 것이다.

세종대왕은 직접 언어학의 기본인 음운을 연구하고 집요할 정도로 반대하는 신하들과 음운학을 논해 물리칠 만큼 조예가 깊었다. 세종대왕의 과학적인 지식과 사고, 옳다고 믿는 것은 끝까지 밀어붙이는 추진력이 조선왕조의 기틀을 쌓았다. 세종대에 수많은 발명의 꽃을 피운 것도 세종대왕의 과학에 대한 사랑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하겠다.

훈민정음의 자모는 현대 음운학으로 봐도 전혀 손색이 없을 만큼 과학적인 것도 이를 방증한다.

세종대왕은 자신의 정책을 끝까지 반대한 최만리를 파직하지 않고 감싸는 등 인재를 아끼는 군주의 풍모를 보였다.

신주무원록은 세종 때 만든 조선시대 최고의 법의학서다. 검시를 하면 자살인지, 타살인지를 과학적으로 알 수 있도록 원나라의 법의학서에 주석을 붙여 조선화한 것이다. 신주무원록 편찬을 총괄하고 있던 최치운은 술보였다. 세종은 최치운에게 친히 '그대가 너무 술을 좋아하여 건강을 해칠 듯 하니 걱정이다. 앞으로 술을 조심하기 바란다'는 글을 내려 그의 건강을 챙기게 했다. 최치운이 그 글을 집에 붙여 놓고 매일 반성을 했지만 결국 40여세의 나이로 술독으로 생을 마감했다.

세종대왕은 야근을 하다 졸고 있는 집현전 학자들에게 손수 이불을 덮어주었다는 일화가 전할 만큼 음악.과학.천문학 등 다양한 학문과 학자들에 대한 애정은 대단했다. 물론 그 이면에는 백성들을 널리 이롭게 하려는 어진 정치에 대한 열의와 이를 실천하기 위해 우선 실용적인 과학기술을 축적해야 한다는 속내 깊은 배려가 깔려 있었다.

세종대 때 간행된 의학서저인 '향약집성방'의 탄생도 우연이 아니다. 세종은 대군 시절 동생 성녕대군이 병약한 것이 걱정돼 직접 의학공부를 시작했다. 이 때 닦아 놓은 의학지식은 임금이 된 뒤 의학을 집대성하는 정책을 펼수 있는 기반이 됐다. 그 때 간행한 의학백과사전인 '의방유취'는 조선시대 의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이는 원대 이전 중국의 처방들을 분류별로 데이터베이스화한 것이다.

세종대왕은 중국과 다른 조선을 강조했다. 그렇다고 국수주의자라거나 편협한 지역주의자로 몰아붙여서는 안된다. 세종의 '조선'은 세계 속의 조선이기 때문이다. 당시의 세계는 중국 중심의 동북아시아였다. 대부분의 선진 문물은 중국으로부터 생산돼 주변국으로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세종의 목표는 중국 원나라대까지 축적된 과학기술을 소화하는 것이었다. 천문학의 경우, 원나라 곽수경이 저술한 수시력(授時曆)을 이해하고 이를 기초로 관측 기구인 간의(簡儀)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역법에 대한 조선학자들의 이해 수준이 높아지자 자연스럽게 조선(한양)의 북극고도를 기준으로 한 독자적인 역법이 나오게 되었다.

세종대왕은 재위 5년째에 당나라와 원나라 역법의 차이를 분석하라고 할 정도로 역법이 우리나라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세종대왕의 의지와 뛰어난 수학자인 이순지.김담이 만남으로써 조선의 독보적인 역법인 칠정산 내.외편으로 완성되기에 이르렀다.

일식과 월식, 5행성의 궤도, 정확한 24절기, 1년의 날수 등은 현대 장비로 측정한 것과 거의 틀리지 않을 정도로 정확하다. 장영실이 만든 물시계인 자격루는 이런 천문학을 바탕으로 한 조선의 표준시보를 만들 수 있었다.

'선진 문물의 주체적인 수입', 말하자면 세종의 과학 정책은 세계 일류의 과학기술 지식을 수입함과 동시에 이를 자연스럽게 조선화하려는 두가지 목표를 이루려는 것이었다. 중국을 추종하거나, 그렇다고 조선만을 고집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이를 위해 최고의 학자들을 등용하고 그들이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다독이고 격려했다. 그들이야말로 자신을 도와 나라와 백성을 이롭게 할 수 있는 실용적인 정책을 수립하고 또 집행하는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이 홀대받는 지금 세종의 과학 사랑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김호 박사 (서울대 규장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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