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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도 관심 "좀비 영화같은 현실" 코로나 전사 35인 고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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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복기 대구시의사회 코로나19 대책본부장의 벨트. 그는 "코로나19와 사투를 벌이는 도중 체중이 10kg 정도 줄었다고 했다. 당시 벨트를 줄여 착용하고, 또 구겨서 착용하길 여러날 반복했더니, 어느 순간 이만큼 벨트가 낡아버렸다"고 했다. 김윤호 기자

민복기 대구시의사회 코로나19 대책본부장의 벨트. 그는 "코로나19와 사투를 벌이는 도중 체중이 10kg 정도 줄었다고 했다. 당시 벨트를 줄여 착용하고, 또 구겨서 착용하길 여러날 반복했더니, 어느 순간 이만큼 벨트가 낡아버렸다"고 했다. 김윤호 기자

코로나 의료진 35인이 쓴 '그곳에 희망을 심었네' 일본어판 표지. 현지 출판사 'CUON'이 일본 발간했다. [사진 학이사]

코로나 의료진 35인이 쓴 '그곳에 희망을 심었네' 일본어판 표지. 현지 출판사 'CUON'이 일본 발간했다. [사진 학이사]

8일 정오 대구시 중구 한 식당. 경북대 의대 이재태 교수와 대구시의사회 민복기 코로나19 대책본부장, 칠곡경북대병원 김미래 간호사 등 의료진 3명이 모였다. 6000명 이상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진자가 나온 대구에서 말 그대로 사투를 벌인 대표 의료인들이다.

대구에서 활동한 의료진 35명 #『그곳에 희망을 심었네』 책 발간 #일기 형태의 글 엮어 꾸밈없어 #일본서 번역본으로 발간해 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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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한 자리에 모인 이유는 코로나19와 싸우는 중에 느낀 생각 등을 언론에 알리기 위해서다. 지난달 중순 이들을 포함해 대구에서 활동한 35명의 의사·간호사들은『그곳에 희망을 심었네』는 책을 발간했다. 350페이지로 이뤄진 책에는 의료진들이 코로나19와 사투를 벌이며 느낀 감염에 대한 공포, 무력함, 동료 의사 죽음을 지켜본 속내 등이 자세하게 담겨 있다.

'그곳에 희망을 심었네' 저자들. 대구지역 의료인들이 대부분이다.

'그곳에 희망을 심었네' 저자들. 대구지역 의료인들이 대부분이다.

이 자리엔 일본 후쿠오카(福岡)에 본사를 둔 서일본(西日本) 신문 가네다 다이(金田達依·39)기자도 참석했다. 그는 "일본에도 『그곳에 희망을 심었네』 책이 나왔다. 코로나19 재유행이 우려되는 만큼 책에 나온 대구의 대처법 등을 의료진들에게 듣고, 일본에 전하기 위해 찾았다"고 했다.

실제『그곳에 희망을 심었네』 는 코로나19를 겪고 있는 일본에서 번역본과 전자책으로 각각 지난 6일과 지난달 20일 출판됐다. NHK, 아사히(朝日) 신문 등 일본 언론들도 앞다퉈 책을 소개했다.

책은 우리나에선 지난달 15일 발간됐다. 페이스북에 국내 출판사에서 책 발간을 예고하는 글을 올렸고, 이를 본 평소 알고 지내던 일본 'CUON' 출판사 측에서 번역본 출판을 제안해오면서 일본어판으로 책이 출판되게 된 것이다.

어떤 내용일까. 일기를 엮어 놓은 것처럼 쓰인 책에는 과장이나 꾸밈이 없다.

'그곳에 희망을 심었네' 일부 내용. 김윤호 기자

'그곳에 희망을 심었네' 일부 내용. 김윤호 기자

'그곳에 희망을 심었네' 일부 내용. 김윤호 기자

'그곳에 희망을 심었네' 일부 내용. 김윤호 기자

늘 담담한 표정만 짓던 의료진들도 코로나19가 무서웠다. 엮은이로 책을 만든 이재태 경북대 의대 교수는 "코로나의 공포는 두려웠고 때로는 섬뜩했다"며 3월의 대구 상황을 기억했다. A병원장은 책에서 "2월 당시 코로나19 환자들은 물론 일부 의사들까지 코로나가 무서워서 덜덜 떨며 이성을 잃고 어지러운 상황이었다"고 했다. 정명희 대구의료원 소아청소년과장은 지난 2월 선별 진료소 앞의 긴 줄을 보고 "좀비 영화를 보고 있는 듯한 현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아 꼬집어보기도 했다"고 적었다.

공포에 '줄행랑'을 놓은 것 같은 의사도 있었다고 책에 쓰여 있다. 이재태 교수는 3월 상황을 책에 담았다. "대구의 코로나 전장으로 보내진 전남 어느 군의 보건지소 근무 의사들이었다. 코로나19 환자 진료에 관한 교육 등을 마무리했으나, 저녁이 되자 모두 포기한다며 줄행랑을 놓은 것 같았다."

'그곳에 희망을 심었네' 엮은이인 이재태 교수. [사진 학이사]

'그곳에 희망을 심었네' 엮은이인 이재태 교수. [사진 학이사]

'그곳에 희망을 심었네' 저자로 참여한 대구시의사회 민복기 코로나19 대책본부장. [중앙포토]

'그곳에 희망을 심었네' 저자로 참여한 대구시의사회 민복기 코로나19 대책본부장. [중앙포토]

우주복 같은 레벨 D 방호복을 입고 있을 때의 답답함도 상세하게 담겼다. 이은주 칠곡경북대병원 음압중환자실 간호사는 "(레벨 D 방호복을 입고 있으면)숨을 참고 있는 것 같은 답답함은 끝이 없었다. 찜질방에서도 경험해보지 못한 온몸의 땅 구멍이 한 번에 열리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고글과 마스크로 눌리는 국소적 통증은 얼굴에 테이핑해도 아주 피할 방법이 없었다"고 했다. 박지원 칠곡경북대병원 63병동 간호사는 "방호복만 입었을 뿐인데도 숨이 막히고, 몸 이곳저곳이 가려웠다. 어지러울 때면 의자에 앉아 심호흡하며 기다린다. 가마 한가운데 있는 것처럼 땀이 줄줄 흐르고 호흡이 가빴다"고 기억했다.

'그곳에 희망을 심었네' 국내판 표지.

'그곳에 희망을 심었네' 국내판 표지.

지난 2월 전국의 의료진들을 대구로 불러모은 출발점은 이성구 대구시의회 회장의 호소문이었다. 호소문이 작성되기 직전의 절박한 상황도 쓰였다. 이 회장은 책에서 "대구의 심각한 상황을 대구 5700여명의 의사에게 전하면 적어도 100명은 도와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호소문을) 쓴 것이다"고 했다.

코로나19 상황이 대구에서 막 시작되기 시작한 2월. 그 첫 7일을 자세히 기록한 글도 있다. 민복기 대구시의사회 코로나19 대책본부장은 2월 17일부터 23일까지 상황을 책에 썼다. "17일 대구엔 아직 환자가 발생하지 않았다. 18일 대구의 첫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왔다. 그날 밤부터 19일까지 대구시장, 시청 공무원 등과 밤을 새워 상황 대처를 준비했다. 20일엔 국군대구병원장에게 연락해 병상 확보를 요청했다. 23일부턴 경증과 중증으로 분류해 새로운 치료센터 개념인 생활치료센터 도입을…."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와 병원 폐쇄를 겪은 A병원 원장은 자신이 코로나19에 감염됐다고 확신하며 의사로서 느낀 무력감을 썼다. 그는 "열이 38.3도까지 올라 감염을 확신했다. 자가격리를 했는데, 밤새 쫄았다"고 책에 적었다.

김미래 간호사. 코로나19와 사투를 벌이던 당시 모습. [중앙포토]

김미래 간호사. 코로나19와 사투를 벌이던 당시 모습. [중앙포토]

이밖에 세계적인 코로나19 검사 모델이 된 드라이브 스루와 워킹스루에 대한 이야기, 소주회사가 술을 만들 때 쓰는 알코올을 기부해온 이야기, 감염으로 안타깝게 사망한 허영구 원장에 대한 의사들의 슬픔 등도 일기 형태로 꾸밈없이 책에 소개돼 있다.

도서출판 학이사 신중현 대표는 "코로나19와 관련한 대구 지역 상황을 책으로 기록해 남겨두면 좋을 것 같아서 엮은이인 이재태 교수에게 아이디어를 전했다, 그랬더니 흔쾌히 받아들였고, 다른 의료진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해줬다"고 설명했다.

대구=김윤호 기자
youknow@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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