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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최범의 문화탐색

거리두기의 인간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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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최범 디자인 평론가

최범 디자인 평론가

근접학(Proxemics)을 창시한 미국의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Edward T. Hall)은 사람들이 취하는 거리두기의 유형을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하였다. 첫째는 ‘친밀한 거리’로 46㎝ 이하, 둘째는 ‘개인적 거리’로 46~122㎝, 셋째는 ‘사회적 거리’로 122~366㎝, 넷째는 ‘공적인 거리’로 366~762㎝다. 이 중에서 세 번째인 사회적 거리는 요즘의 ‘사회적 거리두기’와 거의 일치하여 흥미롭다.

공간의 밀집과 여유는 #삶의 방식인 문화의 산물 #출입 금지 구역이 된 섬 #그 섬에 언제 갈 수 있나

에드워드 홀은 사회적 거리를 다시 가까운 사회적 거리와 먼 사회적 거리로 나누는데, 그 기준은 2.1m다. 그러니까 2.1m 이하는 가까운 사회적 거리로서 상대방 얼굴의 세부와 신체의 전체 모습이 잘 보이기 때문에 그의 행동을 의식하게 된다. 그에 반해 2.1m 이상은 먼 사회적 거리로서 타인의 모습이 보이기는 하지만 그가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크게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로 여유가 있는 상태다. 이처럼 사회적 거리는 의식의 거리이기도 한 것이다.

물론 거리두기의 기준은 문화적인 것이어서 지역에 따라 달라진다. 대체로 아시아는 접촉성 문화이고, 서양은 비접촉성 문화라고 한다. 그래서 아시아인들은 가까이하는 것을 잘 견디고 심지어 즐기지만 프라이버시를 중시하는 서구인들은 꺼린다는 것이다. 프랑스 사람들은 뺨에 입을 맞추는 ‘비주(bisou)’라는 인사를 하지만, 그 외에는 몸을 닿지 않는다. 이제는 바이러스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어디서건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게 되었지만, 이럴 때일수록 물리적으로는 거리를 두더라도 심리적으로는 오히려 더 가까워져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고대 그리스의 시민군인 팔랑크스(phalanx)는 100~256명 정도의 병사들이 방패와 창으로 무장한 밀집보병대였다. 이들은 인간 탱크처럼 단단히 뭉쳐서 웬만한 공격에는 무너지지 않는 강인함을 자랑했다. 이런 경우 아군은 뭉치고 적군은 분산되게 마련이다. 하지만 화포가 발달하면서 이러한 집단화는 치명적인 위험에 처하게 된다. 강력한 화력 앞에 밀집해 있는 것은 떼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1차 세계대전의 기관총 앞에서 병사들은 뿔뿔이 흩어져 참호 속으로 기어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바이러스의 공격으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할 수밖에 없는 인류의 현재 상황이 바로 그렇다.

미국의 엘론대학이 제작한 거리두기 운동 동참 포스터. [사진 엘론대]

미국의 엘론대학이 제작한 거리두기 운동 동참 포스터. [사진 엘론대]

전쟁과 같은 극한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사람 사이의 거리를 결정하는 것은 삶의 방식인 문화인데, 이에 영향을 주는 요소는 많다. 개인간 거리와 공간의 구분, 밀집과 여유에 대한 감각도 모두 문화적인 것이다. 프랑스의 역사학자 필립 아리에스의 『사생활의 역사』에 따르면 유럽은 중세까지 침실과 거실 등의 구분이 없었지만, 근대에 이르러 프라이버시가 발달하면서 방의 분리도 생겨났다.

현대의 도시계획은 한동안 고밀도 방식을 추구한 적이 있다. 르코르뷔지에는 도시의 공간을 기능별로 구분하여 밀집시키고 나머지 공간은 비워두는 방식으로 쾌적한 도시를 만드는 ‘부아쟁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이러한 기능적인 공간 구분이 오히려 비인간적이라는 비판이 있고 다양한 기능이 적절히 혼합된 공간이 친인간적이라는 관점이 더 지배적이다. 공간의 구분, 밀집과 여유는 어떤 관점과 기준으로 보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이러스의 집단 공격에 대한 인간의 대응은 일단 산개(散開)다. 뭉치면 위험하고 흩어져야 안전한 시대가 되었다. 바이러스 사태가 앞으로 한국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킬지, 과연 무엇이 ‘뉴노멀’이 될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정치학자인 김영명 교수는 『신한국론』에서 한국 사회의 기본적인 특성으로 단일성과 밀집성을 든다. 그러니까 밀집성은 단일성과 함께 한국 문화를 결정짓는 상수라는 것이다. 아무튼 지금과 같은 사회적 거리두기가 오랫동안 단일성과 밀집성을 유지해온 한국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킬지 알 수는 없다. 아마도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원심력이 밀집성이라는 구심력을 이겨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까치발로 오래 서 있을 수 없듯이 사회적 거리두기도 무한정 계속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동차와 마찬가지로 이제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적절한 안전거리가 필요해진 시대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예전에 어떤 시인은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정현종, ‘섬’)고 읊었지만, 이제 그 사람들 사이의 섬은 출입금지 구역이 되었다. 과연 언제 그 섬에 가볼 수 있을까.

최범 디자인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