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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약국 10곳서 마스크 한 장 못 사고 보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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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염태정 기자 중앙일보
염태정 정책부디렉터

염태정 정책부디렉터

아침에 식구들에게 마스크를 구해오겠노라고 큰소리치고 집을 나왔다. 3월 10일 화요일. 생년 끝자리 2·7번이 마스크를 살 수 있는 날이다. 내가 사는 날이다. 점심식사를 부랴부랴 마치고 회사 인근 약국으로 마스크를 사러 갔다. 처음 간 약국 입구엔 ‘오늘 판매 종료’란 안내문이 큼지막하게 붙어 있었다. 그다음 약국서도 구할 수 없었다. ‘공적 마스크 공급 저녁 6시부터’란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하지만, 6시에 사러 갈 수는 없었다. 다른 세 곳도 모두 판매 완료. 5곳 모두 허탕 치고 사무실에 들어왔는데 문자가 왔다. ‘11일은 끝자리 3·8번이 살 수 있다’는. 구매안내가 아니라 약 올리려 보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무런 소용없는 구매안내 문자 #정부 위기대응능력 수준 보여줘 #재난대응체계 전면적 개편 필요

기회는 남아있다. 평일에 구하지 못한 사람을 위한 주말 판매. 14일 토요일. 점심을 먹고, 동네 약국에서 다시 마스크 구하기에 나섰다. 대로변 약국보다는 2층 이상이나 지하 약국을 노리라는 조언이 생각났다. 먼저, 동네 상가 3층에 있는 약국에 갔다. 매진이다. 도로변 1층의 약국 세곳엔 물론 없었다. 마지막은 지하 1층에 있는 약국. 역시 매진이다. 약사에게 하루 몇 개 들어오느냐 물었더니 250개라고 했다. 오후 1시 30분부터 팔았는데 금방 나갔단다. 요일제를 하면 좀 나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마스크 구하는 걸 너무 쉽게 생각했구나.’ 반성했다.

나처럼 움직이면 약국 10곳을 돌아도 마스크 한장 사지 못한다. 아침 일찍부터 부지런히 나와 추위 속에서 줄 서 기다려야 겨우 2장 살 수 있다. 이게 현실이고 현 정부의 위기 대응 능력이다. 일반 시민뿐 아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걸려 입원한 환자도 마스크를 못 쓰는 경우가 있다. 치료 현장의 의료진은 마스크·방호복 같은 장비 부족을 말한다. 상황은 이런데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은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에서 “그렇게 부족하진 않습니다. 의료진이 넉넉하게 재고를 쌓아두고 싶은 심정…”이라고 말했다가 십자포화를 맞았다. 전국의사총연합회는 현장을 모르는 망언이라고 반발하며 “무능한 거짓말쟁이 장관의 파면”을 요구한다.

서소문 포럼 3/16

서소문 포럼 3/16

지난 몇 년 세월호 참사(2014), 메르스 사태(2015), 경북 포항지진(2017), 강원 고성산불(2019) 등 대형 재난이 줄을 이었다. 메르스 사태 후 정부는 감염병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을 위해 권역별 전문치료 병원 지정, 시·도별 격리시설 지정 의무화, 역학 조사관 확충에 나선다고 했지만 나아진 게 별로 없다.

음압 병상은 모자라고 병실이 없어 기업 연수원을 빌려 쓴다. 감염병 발생 시 신속하게 역학조사를 실시해 적절한 방역 조치 및 대책을 세울 수 있도록 하는 역학조사관도 부족하다. 현재 역학조사관은 질병관리본부 소속 77명과 각 시·도 소속 50여명 등 130명 수준이다. 숙련된 조사관 양성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고성 산불의 상처도 아직 가시지 않았다. 산불 피해 보상을 둘러싼 분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포항지진 역시 마찬가지다. 피해 복구는 아직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정부가 대책을 안 내놓은 건 아니다. 재난안전법을 개정하고(2014년 12월), 국가방역체계를 개편(2015년 8월)하고 통합 재난안전포털(2016년 4월)도 마련했다. 하지만, 그때뿐 크게 나아진 것은 없다. 대형 재난이 터질 때마다 갈팡질팡하는 정부를 보면 제대로 된 대응책이 있기는 한 건지, 컨트롤 타워는 작동하는 지 의문이다.

정부도 할 말은 있고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을 거다. 박능후 장관이 국회에서 말한 것처럼 “정말 열심히 하고 있는데 (열심히 안 한다고) 그리 말하면 정말 섭섭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 말이 피부에 와 닿지 않는 건 당장 사람들이 마스크 하나 편하게 구하기 어려운 상황이 계속되고, 장사가 너무 안돼 힘들어하는 사람이 바로 옆에 있기 때문이다. 잘 알겠지만 열심히 한다고 다는 아니다. 욕먹는 것보단 낫지만 그렇다고 다른 나라로부터 칭찬 섞인 말을 듣는다고 으쓱할 것도 아니다.

소 잃고도 외양간은 고쳐야 하니 재난 물품 관리를 비롯해 재난대응체계의 전면적 개선이 필요하다. 당장은 마스크 문제부터 풀어야 한다. 아, 그리고 ‘공적 마스크’란 말은 쓰면 안 되겠다. 길게 줄 서 내 돈 내고 사려 해도 살 수 없는 게 무슨 공적 마스크인가.

염태정 정책부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