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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글픈 마스크 난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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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상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이상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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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증·분노·서글픔·안도·허무의 시간이었다고 했다. 약국 배급을 경험한 이의 소감이다. 안도는 그래도 목표물을 구했다는 데서, 허무는 한 시간 넘게 우산까지 쓰고 기다려 손에 넣은 것이 달랑 마스크 두 장이라는 데서 온 감정이었다고 했다. 그는 이렇게 말하며 씁쓸히 웃었다. “6·25 때 죽 배급받을 때마다 내 앞에서 죽이 딱 떨어질까 봐 가슴 졸였다는 얘기를 엄마한테 들은 적이 있는데, 갑자기 그 생각이 나더라.”

약국 앞마다 분노와 고통의 행렬 #‘마스크 정치’가 빚은 참담한 결과 #꾹 참고 줄 선 시민에게 감사해야

어쩌다 국민이 마스크 두 장 때문에 길바닥에서 헤매고 하염없이 약국 문을 바라보며 찬바람 맞는 꼴을 당하게 됐을까. 생산력이 수요에 못 미쳐 생긴 불가항력적 상황이 아니라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던 일이기에 화가 난다.

불행 중 다행으로 한국은 하루에 마스크 1000만 장 이상을 만드는 능력을 갖췄다. 우한 폐렴 발발 이전에 지겹게 우리를 괴롭혀 온 중국발 황사·미세먼지 때문이었다. 공장과 유통사는 봄이 다가오자 열심히 만들고 쟁였다. 그중 수억 개가 설 연휴 직전부터 중국으로 팔려갔다. 관광객이 박스로 나르기도 했다. 공식 수출량이 7억 개고, 보따리상이나 여행객을 통해 흘러간 것까지 포함하면 10억 개가 넘는다는 추산도 있다.

설 연휴 직후만 해도 마스크 수십 개 정도는 가진 가정이 많았다. 싸게 팔 때 사 둔 것이었다. 국내 확진자가 나오자 정부는 마스크 쓰고 손 잘 씻으면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재사용은 피하라고도 했다. 그 무렵 밥벌이를 위해 길로 나서야만 하는 사람들은 하루에 한 개 또는 두 개의 마스크를 소진했다. 마스크 값이 개당 4000원 이상으로 오르고, 그나마도 구하기 어렵게 됐지만 상인들 농간이 빚은 일시적 현상으로 여겼다. 대통령은 수급에 차질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백신이나 치료제도 아니고 고작 마스크인데, 대다수 국민은 그게 허언인 줄 몰랐다.

마스크는 정치적으로 이용됐다. 초기엔 국민 안심용으로 활용됐다. 중국인 입국 금지 여론이 커가자 마스크가 강조됐다. 정부는 바이러스 유입 차단보다 국내 유포 문제를 부각했다. 그러면서도 수출 금지는 하지 않았다. 30명의 환자가 나온 뒤 며칠 잠잠하자 “머지않아 종식” 발언이 나왔다. 위정자들이 일상 복귀를 말하며 마스크를 벗었다. 민얼굴 행인이 늘어났다. 그 무렵 신천지 사태가 터졌다. 마스크가 다시 강조됐다. 불안을 누그러뜨리려 했다. 그런데 마스크가 모자랐다. 뒤늦게 수출을 막았지만 ‘때는 늦으리’였다. 그러자 마스크 3일 사용, 천 마스크 활용이 권유됐다. 급기야 의심 증상 없는 사람은 쓰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까지 했다. 이 와중에 콜센터 집단 감염이 확인됐다. 마스크 안 써도 된다는 말이 쑥 들어갔다.

미국·유럽에서는 마스크 쓰는 사람이 별로 없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맞는 말이긴 하다. 그들은 방한용 마스크 착용 경험이 별로 없다. 그 정도로 추운 지역이 드물다. 우리와 달리 겨울이 습해 건조한 공기를 차단할 필요도 없다. 미세먼지 문제도 없다. 독감 등의 호흡기 감염병에 걸리면 직장이나 학교에 가지 않는다. 가는 사람이 타인에 대한 배려, 예의가 없는 사람이다. 그러니 의사나 공사장 인력이 아니면 평생 마스크를 쓸 일이 없다. 수요가 적으니 생산도, 수입도 적다. 정부가 마스크를 권할 수가 없다. 이게 우리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 미국·유럽과 달리 초고밀도 사회다. 몸이 좀 아파도 일터로 가는 게 미덕이라고 생각하는 이가 많다. 게다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마스크 부국이었다.

마스크가 생명을 지켜준다는 보장은 없다. 그래도 그것 말고는 마땅히 의지할 것이 없다. 위정자 말을 믿는 사람이 바보가 되고, 병원에 입원도 못 해보고 숨지는 감염자가 속출한다. 지도자가 “모범적 방역”이라고 말할 때 오히려 불길한 예감이 드는 나라다. 그러니 마스크 난민들에게 ‘선의의 양보’를 거론하지 말라. 꾹 참고 줄 서는 위대한 시민성에 감사하라.

이상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