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의 가을 손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햇살이 밝은 뜨락에 옹기종기 모아둔 화분의 꽃나무에 가냘픈 모습의 베짱이가 한 마리 앉아있다. 하도 신기해 가만히 바라보다가 다가가서 할딱거리고 있는 작은 몸집을 살짝 건드려 보았더니 그 엽록의 베짱이는 금세 날개를 퍼덕이며 보이지 않는 곳으로 날아가 버렸다.
우리가 세 들어 살고있는 이 집은 산을 깎아만든 집이다. 2층의 옥상 위에 올라가 둘러보면 앞에 보이는 회색 빛 아파트단지와는 달리 뒤로 산이 깎아진 제법 넓은 언덕에는 들깨·콩이 누렇게 잘 익어가고 있고, 밭 가운데는 양손을 벌리고 있는 허수아비가 두개나 세워져 있다.
그리고 그 밭 바깥으로 빙 둘러 엉켜있는 호박 넝쿨에 늙은 호박이 몇 덩이 누워있고, 이제 꽃이 떨어져 부지런히 커가고 있는 예쁜 애호박의 모습도 볼 수가 있어서 어린 날의 제법 풍요로운 고향의 들판을 생각나게 한다.
높은 하늘에 한가롭게 떠 있는 흰 구름과 몇 포기 흔들거리는 갈대의 풍경이 보기 좋고 상쾌해 어느덧 나는 옥상 위에 올라가 한동안씩 바라보고 내려오는 일이 즐거운 습관이 돼버렸다.
이 언덕에서 우리 집까지 놀러 오는 것은 베짱이 손님뿐만이 아니다. 작고 앙증스러운 고추잠자리도 이따금씩 날아오고, 이제 몸의 색깔도 가을의 풀빛으로 변한 들 메뚜기, 다리가 긴 방아깨비, 또 두 눈이 무섭게 튀어나온 사마귀아저씨가 마당에도 찾아오고 방에까지 톡톡 튀며 찾아와 나를 부르고 있다.
나는 저녁을 지으러 부엌에 나왔다가 부엌 바닥에까지 와있는 메뚜기를 보며 문득 어린 날 옛친구가 먼길을 찾아온 것 같은 반가움으로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말없는 대화를 나눈다.<전주시 덕진구 린후2동 1548의 23(한양양품)23통 1반>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