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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하는 게 어때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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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채혜선 기자 중앙일보 기자
채혜선 사회2팀 기자

채혜선 사회2팀 기자

“망했죠?”

소속 연예인의 마약 의혹을 은폐하려고 공익제보자를 협박했다는 혐의 등으로 현재 경찰 조사를 받고 있는 양현석 전 YG엔터테인먼트 대표가 2017년 한 방송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28세 여성 지원자 A에게 했던 말이다. 앞서 아이돌 그룹으로 데뷔도 하고 드라마를 찍기도 했다는 A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A는 이후 제작진과 인터뷰에서 “꿈만 바라보고 열심히 해왔을 뿐인데 사람들은 나에게 ‘망했다’고들 한다”며 눈물을 쏟았다.

A가 최근 다시 떠올랐던 이유는 일이 생각만큼 잘 풀리지 않는 친구 B 때문이다. B는 ‘대학생이 가장 가고 싶은 회사’와 같은 설문조사에서 매번 상위권으로 꼽히는 회사에 다녀 주변의 부러움을 샀지만, 막상 본인은 원했던 일이 아니라며 힘들어했다. 결국 몇 년에 걸친 고민 끝에 그 직장을 그만두고 나와 방송사 PD라는 원래 본인 꿈에 다시 도전했다. 그러나 줄줄이 발표되는 최종 합격자 명단에서 B의 이름을 찾을 순 없었다. 얼마 전 집 근처 카페에서 만난 B는 눈물 범벅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난 망했어.”

A와 B는 그 말대로 정말 망했다고 할 수 있을까. 만약 A가 지인 부탁을 받고 결혼식 축가를 부르게 된다면 그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아름다운 결혼식을 만들어줄 수 있을 것이다. A에겐 그를 필요로 하는 어떤 자리에 가더라도 거기에 있는 사람들의 두 눈을 크게 만들어줄 노래 실력이 있다. B가 PD를 꿈꾸며 운영했던 개인 유튜브 채널과 인스타그램 계정은 나름대로 인기가 있어 주위 모두가 탐내고 있다. B가 경품이 걸린 기업 이벤트를 응모할 때면 당첨을 조금 유리하게 해주는 이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들이 꿈을 위해 보냈던 시간은 결코 허공에 흩어져버린 게 아니었다. 당장 원하는 걸 얻지 못했다는 이유로 ‘망했다’는 말을 쓸 수 없다는 얘기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인생에서 ‘망했다’는 꼬리표를 달만 한 건 별로 없는 게 아닐까. 지금 뜻대로 이뤄지지 않더라도 노력했던 시간은 단단하게 남아 언젠간 삶의 알맞은 순간에 빛날 수 있는데 말이다.

“고난이 많았기에 즐거운 이야기를 쓴다(I’ve had lots of troubles, so I write jolly tales).” 얼마 전 개봉한 영화 ‘작은 아씨들’과 그 원작 소설은 이런 첫 문장으로 시작한다. 세상 모든 A와 B의 인생 첫 문장도 이렇게 쓰여야 한다.

채혜선 사회2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