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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클래식 영파워, 러 음악 꿈나무들 홀리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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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4호 19면

소치국제아트페스티벌 가보니

흑해와 접해 있는 소치는 러시아의 대표적인 휴양지다. 6년 전 우리에게 동계 올림픽 개최지로 알려지기 훨씬 전부터, 인구 35만의 이 작은 도시는 이미 휴양지로 번성했다. 그 초석을 닦은 사람이 옛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이다. 류머티즘에 시달리던 스탈린은 이곳에서 온천요법의 효과를 경험한 뒤 소치를 휴양지로 개발한다. 1934년 당시 기준으로 천문학적인 액수인 10억 루블을 도시 개발에 쏟아부었다.

바이올리니스트 주미 강, 개막 주역 #청소년 연주자들 사인 받으러 줄 서 #피아니스트 김선욱, 폐막 무대 장식 #바슈메트 감독 “젊은 음악도 양성” #청소년 단원·컨템포러리 창작 배려 #“내년 남북서 러 문화예술 알릴 것”

온천이 있다고 해서 온전한 휴양지가 되는 건 아니다. 스탈린은 이곳에 휴양을 겸한 문화예술의 토대를 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도시를 가로지르며 흑해와 맞닿는 협곡의 끝머리 위에 1937년 ‘겨울 극장’을 지었다. 외관은 우람한 고대 그리스식 기둥이 도열한 주랑(柱廊)의 향연. 일반 객석과 박스석을 합한 1100석 극장 안은 관람하기에 알맞은 반원형으로 이루어졌다.

러시아 소치국제아트페스티벌의 예술감독 유리 바슈메트가 스펙타클 콘서트 ‘반 고흐-동생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직접 비올라를 연주하고 있다. [사진 소치국제아트페스티벌]

러시아 소치국제아트페스티벌의 예술감독 유리 바슈메트가 스펙타클 콘서트 ‘반 고흐-동생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직접 비올라를 연주하고 있다. [사진 소치국제아트페스티벌]

매년 이맘때 이곳을 주 무대로 국제예술제가 열린다. 올해 13회를 맞이한 ‘소치국제아트페스티벌(Winter International Arts Festival in Sochi)’이다. 지난 12일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를 모티브로 한 러시아 창작 음악극 ‘돈트 리브 유어 플래닛(Don’t Leave Your Planet)’으로 막을 연 페스티벌은 23일 ‘폐막 갈라 콘서트’로 마무리된다. 폐막 갈라의 끝 무대를 장식하는 주인공은 한국 피아니스트 김선욱이다. 김선욱은 모리스 라벨의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한다.

스탈린이 지은 ‘겨울 극장’서 열려

고대 그리스식 기둥이 웅장한 ‘겨울 극장’의 야경. [사진 소치국제아트페스티벌]

고대 그리스식 기둥이 웅장한 ‘겨울 극장’의 야경. [사진 소치국제아트페스티벌]

올해 이 축제에서 한국 출신 아티스트들의 위용은 대단했다. 클래식 한류를 이끄는 영파워의 한 사람으로 등장한 바이올리니스트 클라라 주미 강은 13일 ‘개막 콘서트’의 히로인이었다. 클라라 주미 강은 생상스의 ‘서주와 론도 카프리치오소’를 선보여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로부터 기립박수를 받았다. 연주 실력 못지않은 젊은 에너지와 카리스마가 관객을 압도했다.

클라라 주미 강

클라라 주미 강

더욱 뿌듯한 일은 연주회를 마친 뒤, 무대 뒤에서 일어났다. 협연 연주를 맡았던 ‘러시아 청소년 오케스트라’ 단원 50여 명이 주미 강의 사인을 받으려고 줄을 서서 대기하고 있는 진풍경이 펼쳐진 것이다. 월드 스타인 그를 선망의 대상으로 바라보며 들뜬 마음으로 기다리는 미래 꿈나무들의 똘망똘망한 눈망울이 인상적이었다.

소치 페스티벌은 연극과 음악극, 합창, 발레, 월드뮤직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우른다. 유명 아티스트의 마스터 클래스와 컨퍼런스, 전시도 함께 열린다. 하지만 예술감독의 높은 위상 때문에 클래식 음악 비중이 높아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올림픽 개최 이전부터 이 축제 예술감독을 맡아 소치를 ‘국제예술도시’로 키운 이는 유리 바슈메트(67). 비올라 연주자로는 ‘현존 최고’라 추앙받고 있고, ‘모스크바 솔로이스츠’와 ‘뉴러시아오케스트라(Novaya Rossiya)’를 창단하여 지휘자로서도 성공한 러시아 음악의 상징이다. 유로뉴스의 볼프강 슈핀들러 기자는 “소치 페스티벌은 곧 바슈메트다”라고 정의했다.

바슈메트는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와 함께 러시아 음악계의 태양과 달 같은 존재다. 푸틴 대통령으로부터 “음악을 통한 공적인 헌신에 감사한다”는 찬사를 받을 정도로 ‘사회적 책무’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 음악가다. 푸틴은 50세 생일 때부터 5년마다 크렘린 집무실로 그를 초청해 음악적 업적을 치하하고 있다고 한다.

소치국제아트페스티벌은 음악의 사회적 기능이라는 면에서 몇 가지 주목할 점이 있다. 우선 미래를 짊어질 청소년 연주자들에 대한 파격적인 우대다. ‘러시아 청소년 오케스트라’는 그 증표 중 하나다. 러시아 각지에서 선발된 12∼22세 청소년 100여 명으로 구성된 이 오케스트라는 늘 축제의 중심에 있었다. 세계적 연주자와의 협연은 물론이고 메인 공연의 연주도 이들 몫이었다. 바슈메트는 “젊은 음악도를 양성하는 교육과 경험은 음악 그 자체를 위해서도, 사회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청소년 오케스트라가 거의 활성화하지 못한 우리 음악계 현실에서 볼 때 부럽기 짝이 없었다.

러시아 창작 음악극 ‘돈트리브 유어 플래닛’. 악조건의 현실에 맞서는 인간의 의지를 담았다. [사진 소치국제아트페스티벌]

러시아 창작 음악극 ‘돈트리브 유어 플래닛’. 악조건의 현실에 맞서는 인간의 의지를 담았다. [사진 소치국제아트페스티벌]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당대, 이른바 컨템포러리 창작(작곡)에도 배려가 많았다. 작곡가로 쿠즈마 보드로프와 호소카와 도시오 등이 주목을 받았다. 현대음악 작곡에 관한 바슈메트의 일갈은 이렇다. “새로운 작곡가를 배출해 내는 일은 또 하나의 예술을 탄생시키는 것이다. 컨템포러리 영역은 난해하다 하여 새로운 시도에 예민하게 반응하지만, 우리는 이를 적극 시도하여 또 하나의 트렌드를 이끌어갈 자신감이 있다.”

올해는 한국과 러시아가 수교한 지 30주년이 되는 해다. 양국 정부에서 이를 기념하는 다양한 사업이 계획돼 실행 중이고, 늘 그렇듯 이 프로그램의 한복판에 문화예술이 놓여있다. 더불어 러시아는 내년에 한국에서 ‘러시아시즌(Russian Seasons)’이라는 대규모 문화예술 이벤트를 개최한다.

2017년 시작한 러시아시즌은 매년 한 개 나라 이상을 정하여 여러 도시에서 음악·연극·발레 공연, 영화 상영, 미술 전시 등 수백 건의 문화행사를 한 해 동안 집중적으로 선보이는 러시아 정부 차원의 자국 문화 해외 홍보 이벤트다. 지난해 독일에 이어 올해는 프랑스·벨기에·룩셈부르크 3개국 공동 개최로 진행 중이다.

올해 한·러수교 30주년 … 교류 본격화

마에스트로 바슈메트는 이 러시아시즌의 특임대사이기도 하다. 마침 이 이벤트의 총괄책임자(CEO) 알렉세이 레베데프도 소치 페스티벌의 컨퍼런스에 연사로 나서 필자와 자리를 함께했다. 러시아는 내년 러시아시즌의 대상국을 ‘한반도(Peninsula)’로 정했다. 한국과 북한에서 동시에 개최한다는 의미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큰 공연들은 한국에 집중해 소재할 예정이다. 총 200여 편을 계획하고 있는데, 어떤 작품들이 각국으로 나뉠지 아직 정해지진 않았다. 기회가 된다면 미래의 평화를 위한 상징적인 공연(행사)도 이루어지길 기원한다.” 레베데프의 말이다.

한국에서 러시아의 문화예술은 1990년 수교 이후 개방과 함께 집중 소개되기 시작했다. 클래식 발레가 앞장을 섰다. 철의 장막을 걷어 내고 나온 볼쇼이와 마린스키, 보리스 에이프만의 모던발레도 뒤를 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관심도가 좀 식었다. 이런 점을 직감했는지 레베데프는 “내년 러시아시즌을 러시아의 문화가 보수적이지 않다는 점을 알리는 좋은 기회로 삼고자 한다”고 말했다.

소치 겨울 극장 운영감독 이리나 가니야로바는 “겨울 극장을 지으면서 스탈린은 ‘사회주의적 이상세계’를 극장에 구현하려 했다”고 들려주었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공연을 즐기는 평등한 공간을 추구했다는 말이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슬며시 방문할 자신만을 위해 무대에 면한 2층에 특별석을, 3층엔 경호원들의 감시창을 두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지하에 항구로 이어지는 비밀통로를 만들었다. 이런 재미난 사연을 품은 겨울극장에서, 축제를 통해 신선한 러시아 문화와 예술의 새로운 바람을 쐬고 트렌드를 체감하는 일은 일종의 아이러니였다. 역사 진보의 증좌였다.

소치(러시아)=정재왈 고양문화재단 대표·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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