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은 고립을 자초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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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대학구내에서 벌어진 대학생들의 프락치추궁 폭행치사사건은 경악과 전율을 동반한 충격이었다. 성역으로 보호받아야할 학문의 전당이 안겨준 실망이었고, 내일을 위해 선택된 우리사회 엘리트집단에 대한 허탈감이었다.
이성을 앞세워 지성을 갈고 닦아야할 토양에서 언제부터 이처럼 끔찍한 불신과 증오와 적대감이 자라봤는가. 우리의 대학은 어디에 서있는가. 4·19와 6·29를 끌어낸 우리의 학생운동은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있는가.
박종철 군의 죽음을 보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겠다고 앞장섰던 사람들이 바로 우리의 대학생이었고 학생운동이 아니었던가. 바로 그 일을 공권력과 주체만 바꿔 몇몇 대학생들이 저질렀다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물론 운동권학생들이 그 동안 끊임없이 프락치망령에 시달려오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바 아니다.
사실여부는 알 수 없지만, 운동권학생들은 6공들어 공안기관원의 대학구내 출입이 제한되고 난 뒤 당국은 자신들의 활동을 염탐하는 프락치를 대학 내에 투입하고 있다고 주장해왔다.
은밀하게 해온 활동으로 수사기관의 추적을 받아 숨어 다니며 어려움을 겪어야했던 일들이 모두 대학 내에 공안기관의 프락치가 투입돼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실제로 프락치공작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나선 학생도 없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번처럼 사람을 죽도록 패는 사형이나, 체제자체를 부정하는 폭력행동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더구나 이번에 희생당한 학생의 경우 프락치가 아니면서 거짓자백을 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얻어맞다가 죽어갔다는 사실이 경찰조사 과정에서 나오고 있다.
학생운동의 목적이 아무리 훌륭한 것이라도 그것은 생명의 존엄보다 앞설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생명에 위협을 가하는 폭력이나 생명을 빼앗는「활동」도 정당화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착각이다.
이번 사건 후 1주일을 지나면서 일부 대학운동권에서는「그래도 우리는 돌과 화염병을 버릴 수 없다」는 소리가 나왔다고 들린다.
동의대사태후「화염병을 버리겠다」고 한 반응과는 대조적이다. 당시의 그 같은 대처가 「공안시국」을 불렸다는 논의까지 없지 않다는 것이다. 오늘날 대학운동권 몇몇 학생들 사이에 번져있는 증오와 적대감의 깊은 골을 보는 것 같아 망연할 뿐이다.
다만 대부분의 대학생들이 이번 사건을 반성과 자숙의 기회로 받아들이고 있음은 불행 중 다행이다.
사건이 발생했던 연세대총학생회는 설인종군 유족과 소속 동양공전, 국민에게 정중히 사죄·사과했다. 서울대나 서강대 등에서도 학생들은 사건의 심각성을 나타내는 입장을 밝혔고 학생운동을 반성하는 대자보도 나왔다.
서울대에서는 20일 오후 5백여 학생이 모여「연대사태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밝혔다. 이번 사건에서 일부 학생들의 과민행동은 충분히 반성돼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이 사건은 학원사찰과 학생운동탄압을 둘러싼 정권과 학생사이의 대립 속에서는 언제나 일어날 가능성이 있고 그 책임은 이 같은 상황을 조성한 정권이 져야한다며 화염병시위를 벌였다.
「이 땅의 모순을 걸머지고 인간권리를 쟁취하겠다」는 학생운동의 투쟁목표가 한 동료의 생명을 앗아간 사건까지도 지나칠 수 있다는 것인가.「투쟁」의 목표가 그렇다면 더더욱 이번 사건에서 학생들은 반성의 기회를 얻고 자숙하는 모습을 보여줬어야 하지 않았을까.
공권력의 폭력을 규탄하면서 스스로는 폭력을 버리지 못할 때 학생운동은 국민으로부터 외면 당하고 사회적 지지기반을 잃게된다. 여태껏 우리의 민주발전에 빛나는 발자취를 남긴 학생운동이 시민적 호응 속에서만 가능했다는 사실에 유념해야 한다.
이웃 일본이나 구미의 학생운동이 70년대 들어 급전직하로 쇠퇴한 원인도 당국과의 충돌과정에서 비롯된 폭력성향 때문으로 분석되고 있다. 폭력성을 띠고 파괴를 서슴지 않게 되면서 시민들로부터 외면 당하고 60년대의 당당했던 위력을 잃게됐다. 외면 당하고 고립되면서 폭력성이 더해가고 그것이 더 큰 고립을 부르는 악순환을 겪은 것이다.
우리의 학생운동은 정치·사회적 안정상태의 서구제국과는 달리 각분야의 부조리를 지적해야 한다는 기대를 받고 있다.
그런 점에서도 운동권학생들은 시민과 인식을 공유하면서 마음속으로부터 지원을 받는 비판세력으로 남아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운동권에서는 먼저 일부 나타나고있는 흑백논리와 폭력성을 과감히 탈피해야 한다. 모든 체제를 타도의 대상으로 생각한다거나 우리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단순논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다음으로는 대학은 무슨 일도 할 수 있다는 식의 특권의식을 모든 대학생들이 스스로 경계해야 한다. 자칫 공안기관의 폭력은 고문이고 타파해야할 죄악이지만, 대학 내에서는 어떤 일이 저질러져도 모든 나쁜 것은 그 책임이 정부로 돌아간다고 생각한다면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설령 폭력에 맞서기 위한 것이었더라도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 폭력이 모습을 나타내면 어떤 훌륭한 주장도 정당성을 잃게 된다. 이번 사건을 통해 우리의 운동권학생들은 도덕성을 크게 손상 당했고, 도덕성을 잃은 학생운동은 무력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주목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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