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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관위 선거판 등판에 스텝 꼬인 야당 "선관위가 자기 정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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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지난 6일 경기도 과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권순일 위원장 주재로 회의가 열리고 있다. 선관위는 이날 회의에서 '안철수신당'의 정당명칭에 대해 사용 불허 판정을 내렸다. [연합뉴스]

지난 6일 경기도 과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권순일 위원장 주재로 회의가 열리고 있다. 선관위는 이날 회의에서 '안철수신당'의 정당명칭에 대해 사용 불허 판정을 내렸다. [연합뉴스]

‘국민당’
9일 창당 발기인대회에서 안철수 전 의원이 ‘안철수신당’이라는 당명을 버리고 급히 만들어 내놓은 새 당명이다. 지난 6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인철수신당’이란 당명 사용을 불허해 나온 궁여지책이었다. 선관위가 올해 들어 정당 명칭 사용에 제동을 건 것은 ‘비례자유한국당’(지난달 13일)에 이어 두번째다.

선관위 "현역정치인 정당 안된다" #안철수측 "선관위가 정치적 판단" #'비례○○당'불허 등 야권 고심 #'음모론'에 선관위 중립성 타격

이번 결정의 이유를 선관위는 “현역 정치인의 성명을 정당 명칭에 명시적으로 포함하는 것은 정당의 목적ㆍ조직과 활동이 민주적이어야 하며, 국민의 이익을 위하여 책임있는 정치적 주장이나 정책을 추진해야하는 정당의 목적과 본질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정당지배질서의 비민주성을 유발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안 전 의원은 지난달 19일 입국 일성으로 불출마를 선언했지만 선관위는 ‘안철수신당’이란 이름 사용은 안 전 의원 본인이 출마할 경우 사전선거운동이 될 수 있다고도 했다.

갈 길 바쁜 야권은 ‘갑툭튀’(갑자기 툭 튀어나오다는 뜻의 신조어) 선관위 결정 때문에 스텝이 꼬이고 있다. 안 전 의원은 이날 새로 만드는 당명을 “국민의당”이라고 말했다가 “국민당”이라고 급히 정정하는 해프닝을 벌였다. 지역기반이 뚜렷하지 않은 국민당(가칭)으로선 가장 큰 자산인 ‘안철수’ 브랜드 활용에 제동이 걸린 것은 적잖은 타격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한국당은 어감이 비슷한 ‘미래한국당’이라는 이름을 찾아내 신고하는 데 9일이 걸렸다. 국민당 한 의원은 “창당작업이 바빠서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받아들인 것”이라며 “선거관리라는 본분을 넘어 선관위가 자기 정치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학계에서도 ‘선관위가 오버했다’는 목소리가 크다. 선관위가 “정당의 목적과 본질” “정당지배질서의 비민주성” 등을 언급한 대목과 관련해서다. 김만흠 한국정치아카데미 원장은 “현재 등록된 39개 정당 중에 ‘목적과 본질에 부합’하는 정당 명칭만 있느냐”며 “과거 사례와의 형평성도 맞지 않는 결정”이라고 지적했다. 익명을 원한 한 정치학 교수는 “안 그래도 규제 중심의 선거법 때문에 ‘깜깜이 선거’라는 비판이 많은데 정당 명칭부터 트집잡으면 정당활동의 자유가 위축될 수밖에 없다”며 “유권자들이 판단할 문제를 선관위가 예단하는 것은 월권”이라고 비판했다.

지난 1월 15일 오전 경기도 과천 중앙선관위에서 열린 '제21대 국회의원선거 대책회의'에서 박영수 사무총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1월 15일 오전 경기도 과천 중앙선관위에서 열린 '제21대 국회의원선거 대책회의'에서 박영수 사무총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같은 날 나온 비례대표 후보자 추천시 “당 대표ㆍ최고위의 전략공천은 위법”이라는 결정의 파장도 만만치 않다. 이 결정에서 선관위는 선거인단을 구성해 비례대표 후보자를 민주적 절차에 따라 ‘투표’로 뽑아야 하고 이 절차를 당헌ㆍ당규에 명문화하라는 방법론도 곁들였다. 선관위의 ‘비장한’ 주문을 말 뜻대로 따르려면 각당은 공천 작업에 상당한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는 여건이다. 민주당은 6~7석 정도로 예상되는 비례대표 당선권 의석을 배분하려면 당 대표의 강력한 직권 행사가 불가피하다. 한국당의 비례대표용 위성정당인 미래한국당은 아직 비례대표 후보자 선출 절차 설계조차 못한 상태다. 호남 기반 군소정당이 통합을 준비중인 호남 신당과 국민당은 더 갈 길이 멀다.

정당들의 꼼수를 막겠다는 선관위의 광폭 행보가 낳은 건 또 다른 꼼수들뿐이다. 민주당의 한 핵심인사는 “선관위 해석을 최대한 폭넓게 해석하면 된다”며 “형식만 갖추면 당 대표 전략공천이 불가능하진 않다고 본다”고 말했다. 한국당의 한 핵심당직자도 “공천관리위원회를 일종의 선거인단으로 보고 그 안에서 ‘민주적 절차’를 거치면 된다”는 반응이었다.

선관위 결정의 정치적 논란은 음모론으로 번질 조짐도 보인다. 야권의 한 재선 의원은 “선관위원 상임위원 임명 과정부터 여권 입김이 지나치다는 말이 많았다”며 “최근 나온 결정들은 선관위 구성부터 균형을 잃었다는 방증”이라고 말했다. “선관위의 결정이 정치적 논란이나 음모론의 대상이 되는 것 자체가 독립기관 선관위엔 치명상이 될 수 있다”는 한 선관위 고위직 출신 인사의 경고가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그는 “선관위는 공기처럼 존재해야 한다”고 했다.

김효성 기자 kim.hyos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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