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포럼

공무원과 코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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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1991년 3월 노동부와 한국노총은 '노동은행' 설립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노동은행 설립은 한국노총이 80년대 중반부터 숙원사업 중 하나로 추진하던 일이었고, 노태우 당시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었다.

노동부의 방침 발표 직후, 지금은 재정경제부에 합쳐진 옛 재무부가 기자들에게 슬그머니 자료 하나를 뿌렸다. 공식 보도자료는 아니었지만 노동은행 설립은 말도 안 된다는 재무부의 입장을 알리는 내용이었다. 감히 대통령의 선거 공약에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나 몇 달 지나지 않아 재무부는 '노동은행의 설립 필요성'에 관한 공식 보도자료를 냈다. 이런 과정을 거쳐 92년 11월 문을 연 게 '평화은행'이다. 평화은행은 외환위기 때 부실은행으로 지정됐으나 노총의 파워 덕분에 퇴출을 모면한 채 2년여를 더 버티다가 2000년 우리금융지주회사의 자회사로 편입됐으며 2001년 결국 간판을 내리고 우리은행에 합병됐다.

공무원이 대통령의 뜻에 반하는 얘기를 공개적으로 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주는 사례다. 그런데 요즘 공무원(직업공무원) 사회에선 '코드'에 대한 불만이 적지 않게 터져나온다.

공무원에게 '코드'는 어떤 의미일까. 공무원은 과연 어디에, 또 어느 정도까지 코드를 맞춰야 할까. 원론적으론 당연히 목표와 모든 사고(思考)를 '국가와 국민의 이익'으로 집중해야 한다. 그러나 대통령과 공무원의 생각-개인이 아니라 공무원 다수의 생각-이 다를 때 대통령의 코드에 어느 정도까지 맞춰야 하느냐는 갈등이 생긴다.

사실 김영삼 정부 이전까진 공무원에게 '코드' 걱정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두환 정부 시절 김재익 전 청와대 경제수석처럼 군사독재정권에 협조해야 하느냐는 개인적 갈등은 있었겠지만 공직사회가 경제발전이라는 공통된 목표에 진력하는 데 별다른 장애물이 없었다. 성장 우선이냐 안정 우선이냐 등의 방법론을 놓고 논쟁을 벌이고, 집권세력이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른 경제정책 등을 주문할 때 약간의 대립이 있었던 정도에 불과했다. 노동은행 문제도 그런 사례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첫 정권교체라고 할 수 있는 김대중 정부 들어 공직 사회에 코드 문제가 등장할 법했지만, 외환위기 수습에 주력하느라 그런 갈등이 대두될 여유가 없었다.

노무현 정부에서는 사정이 달라진 것 같다. 공무원들의 마음고생이 적지 않은 눈치다. 집권세력과 코드가 달라 일하기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공무원도 있다. 인사 때면 '청와대와 코드가 달라 경질됐다'는 말도 나온다.

현 정부의 대표적인 논란거리인 부동산 정책도 코드 갈등의 한 사례로 보인다. 결과적으론 재경부와 건설교통부가 '강남 때려잡기'와 '세금폭탄'으로 요약되는 부동산 정책을 발표했지만, 정책이 확정되기까지 관계 공무원들의 불만이 적지 않았다. 훨씬 급진적인 주장을 그나마 경제부처에서 악착같이 버텨서 완화한 게 현재 정책이라는 것이다. 경제부처에서 내놓은 초안은 묵살되기 일쑤였다고 한다. 경제 부총리나 건교부 장관의 생각은 어떠했는지 모르겠지만, 어쩔 수 없다는 체념과 '이래선 안 되는데'라는 자괴감을 토로한 실무급 간부들이 적지 않았다. 사회복지 정책과 세금 문제에서도 코드를 맞추는 게 잘하는 일인지 헷갈린다는 불평도 많이 들린다.

머지않아 이뤄질 차관급 인사를 앞두고 또 '코드' 얘기가 들려온다. 모 경제부처에선 기관장이 부기관장으로 추천한 인사를 청와대가 '코드가 다르다'는 이유로 반대했다고 한다. 또 다른 부처 차관은 '코드가 맞지 않아' 바뀐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게다가 이번 인사는 '고위공무원단' 제도가 적용되는 첫 사례다. 2, 3급에서 곧바로 차관급으로 승진하는 파격 인사가 이뤄질 수 있다는 의미다.

청와대는 이미 차관 승진 대상을 1급으로 국한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이번 차관급과 후속 인사에서 '코드'의 비중이 더 커질 것 같은 예감이다. 청와대에서 일하는 공무원 출신 고위층 인사들도 이른바 '386세력'의 입김에 밀리는 모양이다.

공무원의 코드 맞추기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의무다. 그런데도 요즘 코드 불만이 공공연하게 터져나오는 게 심상치 않다. 철밥통 공무원들의 집단이기주의적 반발이라고 넘기기 어려울 정도다. 공직사회가 동의할 수 있는, 또는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수용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코드를 강요한 결과는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이세정 경제 데스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