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바초프의 미소」견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노태우 대통령의 이번 방미에 대해 미국은 과거 한국의 다른 대통령 방미 때와는 다른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것은 방문의 실현과 시기 등이 미 요구에 의해 결정된 데 기인한다.
당초 한국정부는 노 대통령의 방미를 내년 추진사항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비록 일본국왕장례식 참석 뒤끝이기는 했어도 부시 미 대통령이 지난 2월 서울을 방문한바 있기 때문에 노 대통령의 금년 나들이는 11월의 유럽방문으로 끝낼 생각이었다.
미국정부는 작년 여름에도 노 대통령의 방미를 타진했었다. 그러나 한국 측은 올림픽 등을 이유로 이에 응하지 못했으므로 이번에도 미 측의 10월 방미 제의를 물릴 수가 없었던 형편이었다.
미 측의 이같은 적극태세 배경에는 한국의 북방정책이 주요 고려요소로 작용되고 있다.
표면적으로 미국은 남북대화, 대중·대소 관계개선 등 한국정부의 북방정책에 대해 지지입장을 표명해 오고있다.
그러나 특히 한국의 대소정책과 관련해 미국은 자신의 입장 천명과 한국 측 의도파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미국은 기본적으로 소련이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 미국의 지도적 위치를 약화시키는데 주력하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고르바초프의 86년 블라디보스토크 연설을 계기로 한 소련의 대아-태평화 공세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태평양지역 군사력은 계속 증가되고 있다는 게 미 측의 분석이다.
이런 배경에서 미국은 한국의 대소접근을 표면적인 지지와 아울러 내면적으로는 우려를 갖고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한반도 주변상황에 관한 미 우려는 소련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전반적으로 아시아 지역에 대한 미 영향력이 최근 부쩍 유동적으로 바뀌는 경향이다. 일본에서는 자민당 수뢰로 보수기반이 약화되고 중국과는 천안문 사태이후 외교관계가 경색되어 있다.
그렇지 않아도 아시아의 중요성과 잠재력을 의식, 이곳에 대한 장기목표 수립을 필요로 하는 미국으로서는 이 같은 아시아의 유동성을 감안해 한국과의 전통적 유대강화가 상대적으로 더욱 시급해진 것이다. 한국 등에서 반미 감정확대로 나타나고 있듯이, 최근 아시아 우방의 대미 신뢰감은 2차 대전이래 최악의 상태라고 미 관계자들은 보고있다.
부시 행정부는 특히 카터 대통령의 주한 미군철수 제안으로 충격을 받았던 한국이 최근 또다시 일고있는 미 의회의 철군논의로 동요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대통령·부통령에서부터 관련부처 실무자에 이르기까지 기회 있을 때마다 철군계획이 없다는 발언을 되풀이하느라 바쁘다. 부시 행정부로서는 아시아-태평양지역에 대한 장·단기계획을 수립할 때까지는 불필요한 동요를 막는 게 중요하고, 이번 정상회담은 그 같은 차원의 대한안보공약을 가장 가시적으로 천명하는 기회가 되는 셈이다.
미 행정부 실무책임자들은 인권·민주화 등 정치문제보다 통상문제가 더욱 절실한 양국간현안이 되고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미국은 아시아 우방과의 무역마찰 증대와 이에 따른 아시아국가들의 대외시장 다변화 노력을 주시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더구나 한국은 지난봄의 미 통상법 301조 관련협상, 여름의 유자망어업협상, 최근의 철강자율규제협상 등으로 대화를 통한 문제해결 실적을 쌓아온 것을 미국은 인정하고 있다.
특히 노 대통령은 민감한 국내상황 때문에 이번 방미를 전후로 눈에 띄는 통상부문의 양보를 미 측에 제공할 수 없는 입장이라는 것을 미국도 알고 있다.
한마디로 미국은 이번 노 대통령 방미를 구체적 현안타결 보다는 기본원칙의 재확인 기회로 삼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특기할 것으로 미국은 노 대통령의 방미 초청이 결과적으로 그에 대한 「후원」이 된다는 점을 이해하고 있는 점이다.
이 같은 미 측 배려는 상·하원 합동회의 연설이 이루어지는 사실로도 입증된다.
미 의회연설은 제3세계 국가이건, 선진국이건 연설자의 국내 소비용으로 십분 활용 된다는 것을 미국은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은 의회연설 기회를 누구에게나 부여하지 않는다. 국가원수 급이라 해도 매우 골라서 부여한다.
처음에는 노 대통령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다. 외교경로를 통한 한국 측의 연설요구에 대해 미 국무부는 『의회가 결정할 일』이라고 하고, 미 의회는 『행정부가 공한을 통해 정식 요청해야 할 일』이라는 반응의 형식으로 노 대통령의 의회연설을 외면했다.
그런가하면 한국의 인권 및 민주화 문제에 관심을 갖고있는 의원들은 이에 대한 반대의사를 간접적으로 나타냈다.
연설 실현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알려진 주미 대사관측은 호주도 작년 호크 총리의 연설을 위해 대대적인 외교노력을 경주한 사실을 들어 이번 한국 측의 집요한 노력을 정당화했다. 6·25 전쟁후인 54년 이승만 대통령이 국빈자격으로 미 의회에서 연설한 일은 예외적이지만, 전두환 대통령 때 한국 측이 한차례 의회연설을 타진한데 대해 냉담한 반응을 보였던 미국이 비록 어떤 과정을 밟았건 노 대통령에게 이런 기회를 제공한 것은 6·29등 국내정치과정과 올림픽 개최·경제성장 등 달라진 한국과 지도자에 대한 미 측의 새로운 인식으로 풀이될 수 있을 것이다.
【워싱턴=한남규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