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제국' 미국은 어디로] 6. 이념의 공장 싱크탱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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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3월,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 취임 두달 후. 백악관 출입기자들이 공군1호기(대통령 전용기) 안에서 대통령에게 "현 정부의 미사일 방어계획은 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책상 서랍에서 보수 성향의 싱크탱크인 헤리티지 재단이 만든 통치 참고자료를 꺼내 흔들었다. "이 안에 우리가 무엇을 할지가 담겨 있다."

이라크 침공 여부를 놓고 미국과 유엔의 줄다리기가 한창이던 지난 2월 26일, 워싱턴 힐튼 호텔에서는 또 다른 보수 성향 싱크탱크인 미 기업연구소(AEI)의 연례 만찬행사가 열렸다. 특별한 인물이 이날 연사로 초대됐다. 대통령이었다.

부시 대통령은 연설에서 "사담 후세인을 몰아내면 중동에 평화가 올 것"이라며 이라크 침공 의사를 분명히 했다. 전후 프로그램까지 밝혔다. 25일 뒤인 3월 19일 미국은 이라크를 침공했다.

그로부터 넉달이 지난 6월 24일, 이번엔 딕 체니 부통령이 AEI를 방문해 연설했다. 그는 전후 이라크에서 미국이 곤경에 처한 것을 의식한 듯 "테러리즘과의 싸움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끝나겠느냐"면서 방어 논리를 폈다. 체니 부통령의 AEI 행사 참석이 언론에 공개되기는 이날이 처음이었지만 AEI 관계자는 "부통령은 AEI의 공식.비공식 모임에 자주 모습을 나타낸다"고 전했다.

'도대체 미국을 누가 움직이는가'라는 질문은 아주 오래 전부터 되풀이돼 왔다. 미국은 '21세기의 제국'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는 현 시점에서 이 질문이 갖는 의미는 더욱 크다.

힘의 정점은 1백46만 미군의 총사령관인 부시 대통령에게 있다. 국방과 외교에 관한 한 대통령의 권한은 거의 절대적이다. '건국의 아버지들'이 확립한 3권분립 원칙에 따라 의회도 국내 정책에 관한 한 대통령 못지않은 힘을 발휘한다.

연방 대법원은 판결로써 '미국적 가치의 기준'을 정하면서 국가의 틀을 수호하고 있다. 여기에 제4부로 불리는 언론이 가세해 여론 형성과 입법.사법.행정부에 대한 감시 역할을 수행한다.

하지만 미국에는 이 모든 권력 외에도 또 다른 힘이 존재한다. '제5부'로 불리는 싱크탱크다.

"미국은 아이디어의 자유경쟁 시장이다. 보다 새롭고 참신한 아이디어가 등장하면 곧바로 사회 곳곳에 전파되고, 국가의 정책에도 영향을 미친다. 아이디어의 생산공장인 싱크탱크야말로 미국의 '소프트 파워'를 상징한다." 워싱턴 소재 한국기업연구소(KEI) 피터 벡 선임연구원의 지적이다.

미국에서 싱크탱크가 처음 등장한 것은 20세기 초였다. 정부의 각종 정책과 예산을 연구해 정책 수립에 도움을 주겠다는, 공익적이고 학문적인 목표에서였다. 이런 이념에 따라 브루킹스 연구소가 1916년 탄생했다.

싱크탱크들은 대부분 '중립적 연구'를 표방해 왔다. 하지만 73년 '보수주의 확산'을 천명하며 출범한 헤리티지 재단은 싱크탱크 역사의 분기점이 됐다.

그해 공화당과 민주당은 세금 감면을 놓고 의회에서 격론을 벌였다. 결과는 공화당의 참패였다. 그런데 며칠 뒤 AEI의 세제개혁안 보고서가 나왔다. 공화당 세제안의 타당성을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자료였다.

"왜 이런 자료를 진작에 내놓지 않았느냐"는 공화당의 비난에 대해 AEI는 "우리는 연구기관일 뿐 특정 정당을 위해 일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에드윈 퓰너(현 헤리티지 재단 이사장)박사 등 젊은 공화당 지지자들이 격분했다. 그래서 처음부터 "공화당과 보수주의 정책에 도움을 주겠다"는 뚜렷한 목표를 내걸고 출범한 게 헤리티지 재단이다.

헤리티지 재단은 2000년 말 부시 당선자에게 '대통령이 해야 할 일(Priorities for the President)'이라는 집권 청사진을 보내는 등 정권 교체기마다 대통령에게 보수주의 입김을 불어넣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헤리티지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당선자에게 보낸 8백개의 정책과제 중 6백개가 정책에 반영됐을 정도다. '별들의 전쟁'이라는 우주방어구상(SDI)도 그때 나왔다. "싱크탱크가 말하면 행정부는 움직인다"는 '금언'이 사실임을 입증한 것이다.

워싱턴에선 싱크탱크를 '회전문(revolving door)'이라고 부른다.

싱크탱크에서 행정부로 자리를 옮겼다가 적당한 시점이 되면 다시 돌아오는 순환과정이 수시로 반복되기 때문이다. 싱크탱크 영향력의 상당 부분이 여기서 나온다는 지적도 있다. 그런 면에서 AEI는 부시 행정부 들어 회전문이 가장 빠르게 도는 싱크탱크다.

부시 행정부 내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의 대부 격인 체니 부통령이 AEI 출신이다. 부인 린 체니 역시 AEI의 연구원이다. 얼마 전 서울에 와 "북한은 지옥"이라는 발언을 했던 국무부의 강경파 존 볼턴 차관도 마찬가지다. AEI의 언론담당 베로니카 로드먼은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 AEI 출신 20여명이 백악관.국방부.국무부 등에서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반면 부시 대통령의 '악의 축'연설문 작성자인 데이비드 프럼,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의 친구인 리처드 펄 전 국방정책위원장 등은 회전문의 저쪽(부시 행정부)에서 이쪽(AEI)로 건너온 경우다. 인재 풀로 치면 헤리티지 재단도 막강하다.

노동부 장관 엘레인 차오, 국무부의 킴 홈스 국제조직담당 차관보, 체니 부통령 자문관인 스티븐 예이츠 등 20여명이 부시 행정부로 갔다. AEI나 헤리티지 모두 연구원 숫자가 50~70명 정도에 불과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등용 비율이 엄청나게 높은 셈이다.

빌 클린턴 행정부가 출범했을 때는 브루킹스연구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브루킹스는 도냐 살라라 보건부 장관 등 고위직 10명을 배출했다.

헤리티지 재단의 발비나 황 연구원은 "클린턴 정부 8년 동안은 헤리티지에서 거의 아무도 행정부에 들어가지 못했다"면서 "그 경우 싱크탱크는 비판논리를 열심히 개발하고, 결과적으로는 그것이 싱크탱크와 행정부 모두에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돈 나오는 곳에서 명령 나온다'는 격언이 있다. 그래서 미국의 싱크탱크들은 이념적 성향과 상관없이 재정적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헤리티지의 연간 예산 중 기업 협찬은 7%에 불과하다. 개인기부금이 전체의 60% 정도를 차지한다. 기업연구소라는 AEI도 기업들의 지원(24%)보다 개인기부금(35%)이 많다. 다른 곳도 사정은 비슷하다.

워싱턴에서는 일주일에도 수십건씩 싱크탱크들이 주관하는 각종 세미나가 열린다. 정부의 정책을 둘러싼 치열한 공방이 오가고, 각종 정책 자료집.논문 등이 한해에 수천건씩 쏟아진다.

워싱턴의 외교 관계자는 "미국의 쇠퇴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이디어가 개방된 미국 지식사회의 역동성을 어떤 나라도 쉽게 따라오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워싱턴=특별취재팀

<사진 설명 전문>
워싱턴 소재 미 기업연구소(AEI) 빌딩. AEI는 조지 W 부시 정권 출범 이후 약 20명의 고위 관리를 배출하면서 보수 진영의 대표적 싱크탱크로 각광받고 있다. 왼쪽은 부시 행정부가 등용한 대표적 AEI 출신 인사들. [워싱턴=신인섭 기자<shini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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