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 공산당의 안락사 <김영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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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모스크바건, 레닌그라드건 소련을 거쳐 부다페스트를 처음 방문하는 사람은 대개 아름다운 다뉴브강이 그 심장부를 흐르는 이 도시의 「서구적」인 활기에 흥분하고 더러는 문화충격까지 느낄 것이다. 모스크바는 거리는 넓고 건물은 우람하고 위인들의 동상은 보는 사람을 압도하지만 도시의 분위기는 무겁기 짝이 없고, 굳이 색깔로 표현하자면 회색밖에 없겠다. 모스크바 최대의 백화점 「굼」또한 규모는 상식 밖으로 크면서 내부는 살만한 물건이 없이 썰렁하게 공동화 되어있다.
거기 비하면 부다페스트는 젊은녹색의 도시요, 유명백화점 「메트로」와 그 밖의 상점에는 상품의 질은 서구의 것에는 못 미쳐도 수요를 충족시킬 만큼 양은 풍부하다. 방 하나 구하기가 힘든 메즈두나로드나야호텔은 모스크바 최고를 자랑하는데 코피한잔 시켜놓고 여로의 긴장을 잠시라도 풀어 볼 만한 분위기 있는 코피숍 하나 갖추고 있지 않다. 반면에 부다페스트의 인터컨티넨틀호텔은시설·서비스·먹고 마시는 것의 질에 있어서 서구의 어느 일류호텔에도 떨어지지 않는다.
뷔페로 차려놓은 아침식탁을 보면 시민들의 과소비로 악명 높은 서울의 고급호텔로 착각할 정도다.
모스크바와 부다페스트의 이런 차이가 헝가리공산당이 스스로의 결단으로 공산주의와의 결별을 선언하고 사회당으로 변신한 지각변동수준의 역사적인 변혁과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공산주의종주국 소련에서 고르바초프가 자신의 정치생명- 그보다도 소련의 국운-을 걸고 추진하는 개혁이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고, 동구의 선진공업국가들인 동독과 체코가 개혁의 압력에 완강히 저항하고 있는데 헝가리만은 서구형 사회민주주의의 틀에 맞는 정치적인 민주화와 시장원리를 도입한 경제개혁을 단행할 수 있는 배경은 무엇일까. 그리고 헝가리의 변신이 민주화의 도상에 있는 한국에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어떤 학자들은 사회십리의 측면에서 헝가리에는 공산화되기 전부터 시민사회의 전통이 있었던 점을 중시한다. 유럽문화의 영향으로 헝가리사람들은 독립된 개인의 자격으로 국가를 대하는 행동원리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오늘날지도층과 민중 사이에는 신뢰관계가 유지되고 있다. 따라서 민중을 불신하는 특권지배층과 무기력하지만 권력을 냉소하는 대중간의 긴장관계가 헝가리의 경우는 사회발전을 저하할 정도로 심각하지가 않다고 판단된다.
중앙에 의한 통제의 배경에는 권력과 민중간의 상호불신이 존재하는 반면, 시장원리는 중앙의 정치적인 통제 없이도 국민 스스로가 각자의 이해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사회질서가 지켜진다는 가설이 옳다면 헝가리가 혁명적인 개혁을 주도하게 된 것이 오히려 당연하다고도 하겠다. 시장원리의 핵심은 가격정책인데, 소위 통합의 위기가 없는 헝가리에서는 사회불안이 수반되지 않는 물가인상을 단행할 수 있었다. 이것이 폴란드와 다른 점이기도 하다.
경제개혁은 국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보다 나은 생활을 위해서는 보다 많이 일을 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소소의 페레스트로이카가 특권을 지키려는 보수적인 지도층과, 적게 일하고 「평등한 빈곤」속에 안주하려는 근로계층의 반대로 위기를 맞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헝가리에서는 정부와 국민간에 신뢰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국민들은 경쟁원리를 바탕으로 한 경제개혁을 보다 많은 노동의 강요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헝가리의 개혁모델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특히 큰 것은 경제개혁과 정치개혁의 병행이다. 정치개혁 없이 경제개혁을 일방적으로 추진한 중국모델이 천안문사태를 초래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헝가리는 국민들의 정치참여와 귀속의식을 높여 개혁주도세력의 정통성을 보강하면서 경제개혁을 추진했기 때문에 내부적인 긴장을 흡수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헝가리는 개발독재에 따르게 마련인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성장의 괴리라는 고비를 무사히 넘긴 것이다.
마르크스는 20세기말의 정보사회 도래를 예견하지 못했다. 특히 유럽은 하나의 정보권-하루생활권으로 통합되어 있다. 텔리비전 화면이나 신문지면에 비치거나 또는 여행 중에 직접 목격하는 바깥세상의 물질적 풍요, 그것을 누리면서 인간다운 삶을 사는 사람들을 보고 누가 「빈곤속의 평등」에 안주할 것이며 위로부터의 지령에 의한 기계적인 노동에 어느 백성이 만족할 것인가.
인간의 창의성은 고사하고 「빵과 서커스」도 제대로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공산당독재가 대중을 상대로 한 상징조작만으로 체제를 유지하기에는 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는 너무 노쇠해진 것이다. 식료품 가게 앞에 길게 늘어선 시민들의 파리한 행렬을 보고 고르바초프도 인간에 대한 모욕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결국 헝가리의 개혁주도 세력은 이런 시대의 변화와 흐름을 정확히 인식하는 눈을 가진 것이다. 마르크스는 1848년 공산당 선언의 첫머리에서 『하나의 요괴가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의 요괴가』라고 갈파했다.
그것은 그의 자본론과 함께 19세기 자본주의경제가 안고있던 일부 모순에 대한 고발이요 처방이었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오늘 자신의 관뚜껑을 열고 나와 그의 추종자들이 이루어 놓은 것, 이루는데 실패한 것, 그리고 공산당정권의 안락사를 보면 충격이 여간 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런 말로 자신을 위로할는지 모른다.『나라는 반면교사가 있었기 때문에 자본주의 경제가 이런 경이적인 발전을 성취할 수 있었다.』<본사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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