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그 영화 이 장면

백두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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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김형석 영화평론가

김형석 영화평론가

시종일관 재난 영화의 장르적 관습을 따라 달려가는 ‘백두산’엔 숨 가쁜 리듬이 잠시 멈추는 듯한 시간이 있다. 북한 요원 리준평(이병헌)이 함흥의 옛집으로 오는 장면이다. 그는 옷을 갈아입고 숨겨두었던 총과 휴대전화를 챙기며 분주하다.

이때 거울에 비친 방 안 풍경은 작은 놀라움을 준다. 누군가가 있었던 것이다. 붉은 담요를 덮고 거실 의자에 앉아 있는, 리준평의 아내 선화. 놀랍게도 그 역을 맡은 배우는 전도연이다. “죽기 전에 못 볼 줄 알았시요”라며 힘겹게 말하는 선화는 마약에 절어 있는 상태. 이후 준평은 자신을 밀고한 사람이 선화라는 걸 확인하고 분노하며, 선화는 “잊었습네까? 가족은 당신이 버린 겁니다”라며 차갑게 대응한다.

그영화이장면/김형석영화 백두산

그영화이장면/김형석영화 백두산

이야기 전개상 사족일 수도 있지만 이 장면이 없었다면 리준평은 이렇다 할 삶의 사연은 없는, 평면적인 캐릭터에 머물렀을 것이다. 선화의 등장으로, 우린 리준평의 진지한 표정과 깊숙한 감정을 접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선화가 단지 준평의 캐릭터 설명을 위한 도구로 사용된 건 아니다.

선화는 더 큰 의미로 영화를 감싼다. 이 신에서 전도연이 만들어내는 표정은 ‘폐허 그 자체’이며, 거대한 재난 앞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자의 그것이다. “지옥에서 만나자”는 말을 남기고 떠나는 준평과, 눈물 고인 눈을 파르르 떨며 감는 선화. 이 영화의 가장 압도적인 스펙터클은 그녀의 존재감일지도 모르겠다.

김형석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