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영화] 그 괴물, 이 놈의 세상이 만든 거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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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연:송강호·변희봉·박해일·배두나·고아성
감독:봉준호
장르:드라마
등급:12세

20자평:괴물·가족·사회를 최신 주방에서 된장맛으로 요리했다. 군침 돌 만하다.

'괴물'은 재미있고 흥미로운 영화다. 우선 재미로 보면 '괴수가 등장하는 가족물'로서 관객의 기대를 기본적으로 충족한다. 충무로에 전례 없이 대규모 디지털기술로 만들어 낸 괴물의 몸놀림은 단박에 합격점을 줄 만큼 유연하고 매끈하다. 그에 맞서는 주인공 가족 역시 개성 강한 배우들이 빚어낸 캐릭터의 힘이 뚜렷하다.

이런 재미보다 더 강한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언뜻 상충하는 요소를 한데 뒤섞은 솜씨다. 외형은 할리우드식 장르이면서도, 그 안에는 아주 한국적인 유머와 사회적 시각을 담아냈다. 이 때문에라도,'괴물'은 새로운 한국형 블록버스터로서 두고두고 회자될 만하다.

영화는 뜸 들이지 않고 곧장 한강변에 괴물이 출현해 인명을 살상하는 소동으로 시작해서, 바이러스 감염을 우려한 정부의 지시로 주인공 가족이 병원에 억류되는 단계로 접어든다. 칸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인 이래 한껏 부풀려진 관객의 기대감을 조금 낮출 얘기부터 하자면, 이후의 연결고리는 의외로 정교하지 않다. 이들이 병원을 탈출하고, 각종 장비를 구해 출입통제된 한강변에 접근하는 각각의 과정은 자세한 설명을 건너뛴다. 감독의 전작 '살인의 추억'같은 치밀함을 기대했다면 좀 성에 안 찰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참으로 흥미롭게도 이를 영화 속 한국 사회의 허술함으로 소화해 낸다. 아버지 강두(송강호)는 괴물에 물려간 여중생 딸 현서(고아성)가 살아 있다며 흥분하지만, 병원.경찰 모두 귀 기울이지 않고 태만한 태도로 일관한다. 삼엄하게 한강변을 경계해야 할 공무원 역시 실은 '염불보다 잿밥'에 관심이 쏠려 있다. 가족들이 현서를 직접 구하도록 내모는 것도, 이 무모한 구출작전의 실행이 가능하게 하는 것도 이처럼 나태하고 부패한 시스템이다. 허술한 시스템에 대한 이 영화의 비판적.풍자적 시각은 점점 거대한 대상을 겨냥한다. 영화 도입부에 독극물을 하수도에 무단방류해 돌연변이 괴물이 탄생하게 하는 미군은 물론이고, 있지도 않은 바이러스를 찾겠다며 난리굿을 벌이는 국제기구 과학자 역시 어이없이 돌아가는 세상 흐름에 큰 몫을 차지한다.

이를 사실적인 고발이 아니라 '100억원대 대작'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희화적인 유머감각으로 그려내는 점에서 이 영화는 더욱 흥미롭다. "내 친구의 사촌의 매형이 순경인데" 하는 할아버지(변희봉)의 대사처럼, 이 사회를 겪어 본 관객일수록 더 크게 웃을 입담이 곳곳에 매복해 있다. 30대 중반인 감독 세대의 감수성도 번득인다. 일례로, 대졸 백수인 현서 삼촌(박해일)의 운동권 전력은 이중으로 활용된다. 화염병은 괴물과 싸우는 무기가 되고, 변절자는 뒤통수를 치는 식이다.

반면 배경의 디테일은 기시감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사실적이다. 영화 초반 현서가 죽은 줄 알고 가족들이 울분에 몸부림치는 장면은 대형사고가 터질 때마다 차려졌던 합동분향소 풍경을 고스란힌 연상시킨다. 심지어 양궁선수인 현서 이모(배두나)가 출전한 시합 장면은 실제 스포츠중계의 전형성을 의도적으로 모방한다.

이처럼 사실적인 동시에 사실적이지 않은, 다시 말해 사회성을 희회화하는 것이 이 영화의 영리한 전략이다. 그 사이에 혹 생길 수 있는 이질감은 연기력 출중한 배우들이 너끈히 메운다.

'오락물 아님 사회물'이라는 이분법을 거부하는 이 영화의 입장은 마지막 장면에서 한결 뚜렷해진다. 주인공 가족은 후일담을 전하는 TV 뉴스를 발로 꺼버린 채 밥 먹는 일에 몰두한다. 그네들이 맞서 싸워야 했던 것이 돌연변이 괴물이든, 허술한 시스템이든,'먹고'사는 일이 제일이라는 태도다.

괴물의 유려한 움직임은 해외기술진의 도움으로 완성됐지만, 이 괴물이 태어나고 활보한 배경에는 이 사회가 있다. 합리.원칙보다 임기응변.맹신에 기대온 이 세계의 구성원이 모두 '괴물'의 탄생에 기여한 셈이다. 이 기여까지 자랑해야 할지, 아니면 이를 블록버스터 오락물의 사회성으로 응용한 감독의 역량에 감탄하는 데 그칠지는 관객의 몫이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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