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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철호 칼럼니스트의 눈

문 대통령이 셀까 시장의 힘이 셀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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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이철호
이철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한국경제 만성 질환 ① 친노조 정책

새해 벽두부터 쌍용차 복직자들이 무기한 유급휴가에 반발해 출근 투쟁을 벌이고 있다. 쌍용차는 SUV 경쟁 격화로 내수 판매가 줄어들고 수출도 3년 만에 반토막 났다. 기약없는 연명치료 대신 근본적 수술이 필요한 시점이다.

새해 벽두부터 쌍용차 복직자들이 무기한 유급휴가에 반발해 출근 투쟁을 벌이고 있다. 쌍용차는 SUV 경쟁 격화로 내수 판매가 줄어들고 수출도 3년 만에 반토막 났다. 기약없는 연명치료 대신 근본적 수술이 필요한 시점이다.

스웨덴·노르웨이·덴마크를 포함한 노르딕 국가에는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얀테의 법칙’이란 게 있다. 이기심을 절제하고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중시하라는 삶의 덕목으로, 이미 사회학적 용어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당신이 남들보다 똑똑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당신이 남들보다 더 많이 안다고 생각하지 마라’ ‘당신이 모든 일을 잘한다고 생각하지 마라’…. 얀테의 법칙은 스스로 특별하다거나 더 낫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비슷한 내용을 10개 항에 걸쳐 반복적으로 강조한다.

쌍용차도 일자리 위해 구제금융? #시장에 좌우될 향후 운명 불투명 #과감한 구조조정과 생산성 제고 #‘얀테의 원칙’과 대타협이 해법

지난해 6월 문재인 대통령은 스웨덴을 방문해 총리 관저 대신 스톡홀름 인근의 쌀트쉐바덴 그랜드 호텔에서 스테판 뢰벤 총리와 정상회담을 했다. 이 호텔은 1938년 세계 대공황 속에서 ‘사회적 대화’의 위대한 모범으로 꼽히는 쌀트쉐바덴 협약이 체결된 역사적 장소이다. 노사가 타협을 강조하는 얀테의 법칙이 몸에 밴 덕분에 그런 상생이 가능했는지 모른다. 이런 성공 바이러스는 이웃 국가에도 전파돼 1982년 네덜란드의 바세나르협약, 2003년 독일의 하르츠 개혁으로 퍼져나갔다.

협약 이후 스웨덴 노총은 경영진을 주적(主敵)으로 보지 않는다. 임금교섭을 할 때 주변국의 임금과 가격 경쟁력, 국내 업종이나 노동자 간 임금 격차 최소화 등을 핵심 기준으로 삼는다고 한다. 독일의 노조는 사용자와 손잡고 아예 4차 산업혁명의 주력군이 되고 있다. 바세나르 협약 당시 네덜란드 노총위원장이던 밤 콕은 그 후 재무장관·총리에 올라갔다. 이런 유연한 노사관계를 통해 북유럽은 고임금은 낮추고 저임금을 올리는 연대 임금제까지 도입해 사회 양극화를 줄이고 있다.

지난해 9월 국내에서도 쌍용차 해고자에 대한 노사정 사회적 대타협이 이뤄졌다. 하지만 연초부터 평택 쌍용차 공장 앞 풍경은 스산하다. 마지막 해고자 46명이 복직은 됐지만 일거리가 없어 생산라인에 투입되지 못했다. 다시 근로계약서를 쓰고 사원번호도 받았으나 사원증이 나오지 않아 회사에 ‘방문객’으로 드나들고 있다. 70%의 임금만 받는 무기한 유급휴가 상태다.

쌍용차 판매 추이

쌍용차 판매 추이

쌍용차 해고자는 현 정권 최대 현안 중의 하나였다. 문성현 노사정위원장은 2018년 봄 비밀리에 당시 최종식 쌍용차 사장을 접촉해 “어떻게든 해고자를 복직시켜 달라”고 요구했다. 현대차 부사장 출신의 최 사장은 쌍용차 회생을 위해 긴급 투입된 자동차 전문가로 문 위원장과 서울대 경영대 동기. 최 사장은 친구의 부탁에도 “티볼리 신차 효과로 간신히 적자에서 벗어났지만 아직 경영 여력이 없다”며 난색을 표했다.

극적인 변곡점은 2018년 7월 문 대통령의 인도 국빈 방문이었다. 문 대통령은 쌍용차 대주주인 아난드 마힌드라 회장을 만나 “해고자 복직 문제에 관심을 가져달라”고 부탁했다. 그 후 두 달 만에 최 사장이 처음으로 서울 대한문 앞에 설치된 쌍용차 해고노동자 고 김주중씨의 분향소를 찾아 조문했다. 정치적 압박이 통한 상징적 장면이다.

쌍용차 해고자를 향한 문 대통령의 애정은 각별했다. 2012년 대선 때 해고자 가족들을 찾아 “폭력 진압의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하겠다”고 약속했다. 2017년 대선에선 쌍용차 사태를 언급하며 “정리해고 요건과 절차를 강화하겠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투옥된 한상균 전 민주노총 위원장에 대해 “눈에 밟힌다”고 했다. 그는 쌍용차 옥쇄파업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작년 9월 쌍용차 복직의 사회적 합의가 나오자 문 대통령은 트위터에 “매우 기쁘고 감회가 깊다”고 썼다.

하지만 앞날은 순탄하지 않다. 쌍용차는 최근 11분기 연속 적자를 냈다. 신차 부재와 판매 부진, 실적 악화의 수렁에 빠져 지난해 1분기 278억원 적자→2분기 491억원→3분기엔 1052억원으로 적자가 불어났다. 지난해 전체로는 4000억 원대 적자를 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시장 반응은 싸늘하다 못해 꽁꽁 얼어붙었다. 여전히 2000원 언저리를 맴도는 주가만 봐도 알 수 있다. 마힌드라 그룹이 인수한 10년 전에 비해 90%나 폭락해 사실상 뇌사상태다.

쌍용차는 ‘SUV의 명가’로 자부했지만 현대차의 ‘팰리세이드’와 기아의 ‘모하비’, GM의 ‘트래버스’에 치명타를 맞았다. 소형 SUV인 티볼리마저 현대차의 ‘코나’와 ‘베뉴’, 기아차의 ‘스토닉’과 ‘셀토스’ 등에 협공당하고 있다. 당분간 경쟁력 있는 신차를 내놓을 계획도 없다. 여기에다 수출 부진도 발목을 잡고 있다. 미국의 경제 제재로 러시아에 이어 이란 수출길이 막히고 유럽의 환경 규제 강화에 따라 디젤차 수출마저 어려워졌다. 한때 8만대를 웃돌던 수출은 지난해 2만5000대로 쪼그라들었다.

쌍용차 경영은 빈사 상태다. 부채비율은 285%로 전년 대비 80%포인트나 치솟았다. 올해 만기가 돌아오는 차입금 갚기도 벅찰 정도다. 이에 따라 쌍용차는 지난해 임원 20% 감원, 급여 10% 삭감에 이어 올해도 임금 동결과 연말 일시금 100만원 삭감, 상여금 200% 반납 등의 추가 자구안을 내놓았다. 온건한 기업 노조를 중심으로 94%가 자구안에 동의했다.

이렇게 사전 교통정리가 되자 지난 16일 마힌드라 코엔카 사장이 방한해 산업은행에 대출 만기연장과 함께 2700억원 규모의 청구서를 들이민 것으로 알려졌다. 그다음 날엔 이목희 일자리위원회 부위원장과 문성현 경제사회노동위원장을 만났다. 이런 행보를 보면 마힌드라의 계산은 뻔하다. 4월 총선을 앞두고 ‘일자리’를 빌미로 최대한 정부 지원을 끌어내겠다는 것이다. 2018년 봄 지방선거를 앞두고 GM이 군산공장을 폐쇄하고 한국 철수를 압박해 8100억원을 받아낸 것과 닮은꼴이다. 쌍용차 해고자들도 “갑작스런 무기한 유급휴가 역시 우리의 복직을 볼모 삼아 정부 지원을 받아내려는 속셈”이라고 분통을 터뜨린다.

아마 복직자들은 정부 지원이 이뤄지면 다시 생산라인에 설 것이다. 하지만 쌍용차가 언제까지 버틸지는 아무도 모른다. 복직까지는 문 대통령의 정치적 파워가 작용했지만, 그 이후 쌍용차의 운명은 시장의 힘에 달려있다.

경쟁업체들은 이미 멀찌감치 앞서가고 있다. 지난해 10월 현대차는 극비시설이던 의왕연구소를 처음 공개했다. 거의 사람 손길 없이 인공지능(AI)과 로봇을 중심으로 완성차를 조립하는 미래형 공장이다. 노조 대의원 500여명도 연구소를 둘러보며 생산 환경이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음을 절감했다고 한다. 사실상 ‘노동의 종말’을 예고하는 현장이다. 여기에다 세계 자동차 업계는 전기차·자율주행차 시대를 앞두고 역대급 몸살을 앓고 있다. GM·포드·닛산 등은 수만 명씩 인력 구조조정을 하면서 미래차에 자원을 쏟아붓고 있다. 이에 비해 한국에서 공장을 돌리는 GM·르노·마힌드라는 첨단 투자는커녕 일자리를 빌미로 최대한 정부를 압박하는 데 열심이다. 그렇다고 해외자본이 지원 대가로 약속한 밝은 미래가 올지도 불분명하다. 한국GM의 경우 8100억원을 지원받은 후 일방적으로 법인을 생산법인과 연구개발법인으로 분할하고 잇달아 비정규직을 해고한 바 있다.

쌍용차에 관계된 한 고위 인사는 익명을 전제로 이렇게 말했다. “솔직히 국내 자동차 공장은 인건비 부담으로 도저히 글로벌 경쟁이 안된다. 그나마 경쟁력 있는 연구개발 기능만 남기고 외국계 기업들부터 생산·조립에서 완전히 손을 떼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인다. 현대·기아차를 빼곤 어떻게 고통 없이 안락사할지만 남은 분위기다.” 그는 자신이 지켜본 다른 자동차 업체의 노사협상 과정도 소개했다. “일자리 유지가 중요한 20~40대 노조원들은 비교적 유연한 편이지만 노조원 비중이 높은 50대일수록 굉장히 비타협적이어서 놀랐다.”

노사 갈등 없는 사회는 없다. 또한 예전에는 노조가 사용자에 대한 투쟁과 협상이 전부였지만, 글로벌 시대에 진짜 경쟁자는 같은 제품을 만드는 중국·미국·유럽 공장의 근로자들이다. 따라서 최선의 해법은 얀테의 법칙과 노르딕 방식의 대타협이다. 최영기 전 노동연구원장은 “대기업 정규직 노조의 통 큰 양보와 연대 임금 쪽으로 옮겨가는 노사정 대타협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대우조선해양과 GM대우에 이어 쌍용차에서도 외국자본과 노조에 휘둘려 구제금융을 쏟아붓는 땜질식 처방에 그칠 분위기다. 큰 그림 아래서 과감한 구조조정과 생산성 향상 등 시장 원리에 따른 근본적 수술은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친노조 정책으로 이런 식의 진통제만 놓으면서 기약 없는 연명치료에 매달리다간 언제 가혹한 시장의 역습을 당할지 모른다.

이철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