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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청년의 신장·각막이 연주한다…대륙 울린 5인조 음악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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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문외한으로 구성된 중국 충칭(重慶)의 5인조 ‘한 사람의 악단(一個人的樂隊)’이 수백만 중국인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슬픈 노래를 불러서가 아니다. 악단의 탄생 스토리가 듣고 보는 이의 마음을 흔들기 때문이다.

호주 청년 필립의 장기 기증으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중국 충칭의 다섯 명이 '한 사람의 악단'을 구성해 필립의 공익 활동 꿈을 이어가기로 했다. [중국 환구망 캡처]

호주 청년 필립의 장기 기증으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중국 충칭의 다섯 명이 '한 사람의 악단'을 구성해 필립의 공익 활동 꿈을 이어가기로 했다. [중국 환구망 캡처]

악단이 만들어진 계기는 201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충칭에 살며 각기 다른 질병으로 장기 이식을 기다리던 다섯 남녀에게 희소식이 전해졌다. 마침내 수술을 받을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27세 호주 청년의 장기 기증으로 #충칭 다섯 남녀가 새로운 삶 찾아 #고인의 공익활동 꿈 대신 이루고자 #5인조 악단 조직해 뜻 기려가기로

의사인 우쥔(伍俊)은 간경화를 앓고 있었는데 간장 이식 수술을 받았다. 부동산 판매원인 모리(茉莉)와 의사인 천징중(陳景鍾)은 고장난 신장을 장기 기증자의 새 신장으로 바꾸는 행운을 잡았다.

또 농촌의 평범한 가정주부인 탄다오비(譚到碧)와 화물트럭 운전기사인 천셴쥔(陳賢軍)은 각각 각막 이식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천셴쥔은 각막이 괴사해 2017년부터 1년 이상 장기 기증을 기다렸는데 2018년에야 기회를 얻었다고 밝혔다.

중국인 다섯 명에게 새 생명을 주고 떠난 호주 청년 필립의 생전 모습. 음악을 좋아한 그는 공익 활동에 열심이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중국 환구망 캡처]

중국인 다섯 명에게 새 생명을 주고 떠난 호주 청년 필립의 생전 모습. 음악을 좋아한 그는 공익 활동에 열심이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중국 환구망 캡처]

다섯 남녀가 새 생명과 광명을 되찾은 시점은 모두 2018년의 비슷한 시점이었다. 기증자가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2019년 충칭적십자사로부터 장기 기증자가 외국인, 즉 호주의 한 청년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 충칭에서 외국인 장기 기증이 이뤄진 건 첫 번째였다.

충칭적십자사에 따르면 중국인에게 아무 조건 없이 자신의 여러 기관을 기증하고 세상을 떠난 이는 당시 27세의 호주인 필립 핸콕이었다. 필립은 충칭시난(西南)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는데 그해 5월 9일 당뇨병으로 사망했다.

필립은 호주에 있을 때부터 장기 기증을 주장했고 그 자신이 장기 기증 지원자이기도 했다. 부모는 그의 뜻을 따라 중국인에게 필립의 건강한 신체 기관을 기증하기로 했고 이에 따라 충칭의 다섯 남녀가 새로운 삶을 찾게 된 것이다.

중국 충칭의 한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치다 병사한 호주 청년 필립의 부모가 생전 필립의 바람에 따라 장기 기증에 서명하고 있다. [중국 신화망 캡처]

중국 충칭의 한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치다 병사한 호주 청년 필립의 부모가 생전 필립의 바람에 따라 장기 기증에 서명하고 있다. [중국 신화망 캡처]

그런 필립의 고귀한 뜻을 충칭적십자사는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다섯 남녀에게 연락해 기증자 신분을 밝히고 필립이 생전 음악을 좋아했으니 작으나마 감사의 표시로 악단을 조직해 보는 게 어떻겠냐는 의사를 피력했다.
충칭의 ‘한 사람의 악단’은 그렇게 탄생했다.

이들 모두 과거 음악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한뜻으로 연습에 임하기로 했다. 의사 우쥔은 기타, 화물트럭 운전기사 천셴쥔은 베이스, 의사 천징중은 방울 소리를 내는 요령을 들었다. 또 부동산 판매원 모리와 농촌에서 양과 돼지만 치고 살아 사실상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는 말을 듣는 주부 탄다오비는 라틴 아메리카 음악에서 쓰는 리듬 악기인 마라카스를 맡았다.

중국 충칭의 한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치다 27세에 병사한 호주 청년 필립은 자신의 장기 기증으로 중국인 다섯 명에게 새로운 삶을 안겼다. [중국 신화망 캡처]

중국 충칭의 한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치다 27세에 병사한 호주 청년 필립은 자신의 장기 기증으로 중국인 다섯 명에게 새로운 삶을 안겼다. [중국 신화망 캡처]

이들 5인조는 사는 곳과 직업도 달라 모이기 어려웠지만 지난해 8월부터 전문 음악강사의 지휘를 받으며 틈 날 때마다 연습을 강행했다. 이제까지 약 세 차례 정도 리허설을 했다고 한다.

‘다시 태어나다(重生)’나 ‘생명을 느끼다(感受生命)’와 같은 노래를 연습 중이다. 이들의 꿈은 분명하다. 필립이 좋아했던 음악을 통해 보다 많은 공익 활동이 이뤄지도록 한다는 필립의 생전 꿈이 조금이라도 실현될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하겠다는 것이다.
베이징=유상철 특파원 you.sangchu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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